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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동학 최후항쟁지 이제는 산자의 몫

[완주신문]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혁명군은 고산으로, 진안으로 숨어들었고 일본군은 혁명군을 추격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형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삼아 대륙을 침략할 심산이었기에 후방의 안전을 위해 혁명군을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혁명군으로 몰아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삼례에 혁명군이 모였을 때 삼례의 장정 5천명이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 토벌대 대장의 기록에 의하면 삼례에는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삼례의 집집이 한 명씩은 혁명군에 참여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당시 삼례의 모든 집에서 최소한 한 명씩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혁명군은 살기 위해 선교사에게 몸을 의탁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작은 시골에 100년이 넘는 대형교회가 많은 이유다.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면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끝까지 항쟁을 선택한 50여명은 대둔산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1895년 2월 18일 만든 보고서 ‘대둔산부근 전투상황(大芚山附近 戰鬪詳報)’에는 25명을 사살하고 50자루의 화승총, 약간의 화약, 서류를 획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후항쟁지 25명의 사망자 중에는 20대의 임산부가 있었고, 접주 김석순은 1살 된 여아를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며 단 한 명도 투항하지 않아 모두 사살되었다는 기록도 찾았다. 

 

일본군은 투항하지 않은 혁명군을 모두 사살하였지만 어린아이 한 명만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살려 두었다고 한다.

 

최후항전에 대한 자료를 찾아가며 혁명군이 최후를 맞았던 곳에 직접 가서 현장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 봐야 혁명군의 최후를 마음에 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있는 정보는 형제봉(미륵바위) 인근의 절벽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장에 다녀온 후기를 기록한 블로그에 여러 지명이 나오는데, 내가 대둔산의 지명을 모르기에 무용지물이었다. 형제봉(미륵바위)만 찾으면 될 것 같아 2017년 겨울 무작정 대둔산을 찾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대둔산도립공원 관리사무실을 찾아갔다. 동학농민혁명 최후항쟁지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어 겨우 한 사람과 통화를 했지만, 겨울이라 길이 미끄럽고 위험해서 올라갈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더구나 혼자서 올라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대둔산 최후항쟁지에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지 못해 무심한 세월만 보내던 중 우연히 완주의 마을과 사람의 기록으로 남기는 황재남 작가의 SNS에서 동학농민혁명 최후항쟁지 답사 사진을 보게 되었다. 바로 전화를 했고 답사 일정을 잡았다. 지난 11월 15일 마침내 동학농민혁명 최후항쟁지에 오르기 위해 만경강사랑지킴이 10명이 모였다.

 

혁명군은 대둔산 등산로에서도 한참을 벗어나 계곡을 가로지르고 가파른 산길을 기어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선택한 곳은 절벽 위로 사람의 접근이 어려웠고,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급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민가에서 중간쯤에 보급품을 놓고 가면 이들이 내려가서 짊어지고 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보고서에는 10분쯤 떨어진 곳에 암자터가 있어서 그곳에서 물을 길어 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길을 걸어 보아야 역사를 피에 새길 수 있다고 했다. 혁명군의 죽음의 자리에 서 보니 그들의 삶이 내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전하는 것은 이제 산 자의 몫이 되었다. 그 시작은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간 분들을 안전하게 만날 수 있도록 등산로와 사다리를 정비하는 것과 이정표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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