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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위봉산성 홍예문의 美

[완주신문]위봉산성은 숙종 원년부터 숙종 8년 사이 쌓았다고 전한다. 축성을 위해서  진안 군민들까지  공력에 참여했다고 한다.

 

위봉산성은 관민이 하나가 되어 전쟁에 대비한 관방 시설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변란시에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의 위패를 옮겨 와서 보호하려는 특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동학혁명이 일어나서 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태조 어진을 위봉산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위봉산성은 주변 위봉사와 위봉 마을을 감싸고 두른 포곡신 산성으로 성벽 둘레는 약 8키로 정도이고, 성벽 높이는 2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필자는 서문(홍예문)에서 성벽을 따라 오르다 보면 태조암 뒷편 되실봉 가는쪽으로는 성벽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어서 성벽의 높이와  축조의 미를 감상 할 수 있었다. 또한 유사시에 적군은 모르고 아군만 알고 출입하기 위한 암문도 볼수 있었다.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 장대 포루지 건물지 수구지도 있었다고 전한다. 성안에는 우물도 20곳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웅장 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위봉산성 홍예문은 전체적으로 옹성의 형식을 취하는데 옹성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난공불락의 어려움을 말할 때 ‘철옹성’이란 말을 쓰곤 한다. 또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의 출입을 어렵게 하기 위하여 경사진 곳 위에 성문을 만들었다. 서문은 무지개 형상을 한 홍예문으로 둘렀다. 조선시대부터 홍예문은 읍성이나 도성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는데 산성 중에서도 규모가 큰 포곡신 산성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우리가 알기로 홍예문은 구조상으로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축조 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데 위봉산성에 태조 어진을 모신다는 생각에서 일반 성문이 아닌 홍예문을 만들어서 더 공력을 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봉산성의 아름다운 홍예문 축조 구조를 살펴보면 우선 땅 위를 평탄케 다듬고 지대석위에 홍예기석(선단석) 을 3단까지 쌓아 올렸다. 그리고 홍예기석 위부터 거의 크기와 무게가 조금씩 달라 보이는 홍예돌을 둥그스름하게 깍아서 반원형의 홍예를 틀어 올렸다. 일반적으로 홍예를 틀때는 선단석 위에 목조로 짜여진 반원형의 비계틀을 가설하고 그 비계틀 위로 좌우에서 동일하게 홍예석을 홀수로 쌓아 올린후 마지막에 홍예 종석(머릿돌)을 박아 넣고 마무리 하는데 위봉산성 서문도 그랬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리하면 돌과 돌이 누르며 잡아당기는 석재의 압축 강도 장력에 의해서 힘이 균등하게  배분이 되면서 아름다운 구조가 완성 된다. 산성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 홍예문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문의 천장은 전체 홍예는 하지 않고 내외벽면만 내외홍예를 틀고 내부 구간은 문루 아래부터 위까지 석재로 쌓아 올린 다음 마감하였다. 성문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또한 성문 통로 바깥 홍예문 아래에는 문지도리가 있어 성문(문비)가 있었을 것이다. 성문 주변에는 무사석이라는 일반 성돌 보다 더 크고 단단한 부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송광사 지나 위봉산성 뱀재(사치)를 구불구불 어렵게 올라오면 정상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 위봉산성 서문지이다.

 

필자가 얼마전에 위봉산성에 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서문 홍예문 위에서 사진을 찍고 성벽위를 걷거나 소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산성에서의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이 보기는 좋았지만 저들 중에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에 몇자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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