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신문]제22회 완주삼례딸기축제가 마무리됐다. 삼례딸기축제는 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2018년부터 모니터링하고 정리해 기록을 남겼다. 첫해 모니터링 한 내용을 삼례농협 평가회에서 발표했는데, 뒤에서 “삼례사람들 피를 빨아 먹고 산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아마 돈을 받고 모니터링을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코로나로 2021년, 2022년 쉬고 2023년에도 돈 안받고 축제장에서 한 설문조사 결과분석까지 해서 마을신문에 실었다. 원고료도 없었다. 용역비 없이 축제 모니터링을 3일동안 했다. 서두가 장황한 이유는 삼례딸기축제에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뜻이고, 누구보다 깊이 지켜보는 1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함이다. 애정 어린 비판이 축제를 축제답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 삼례딸기축제에 주는 점수는 90점이다. 먼저 축제가 매우 젊어졌다. 우석대 학생들의 부스와 푸드트럭, 키즈존, 업체 대표들의 우석대 학생 할인 행사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청소년과 대학생, 젊은 부부들이 50대 이상을 추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필자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이야기다. 두번째 매우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딸기’라는 일관된 주제로 통일돼 좋았다. 부스가 비
[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하여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만경강은 동상면 밤티마을에서 시작하여 동상, 대아저수지를 거쳐 고산에서 경천저수지의 물과 만나고 회포대교 아래에서 소양천과 합하고, 삼례교에서 전주천과 하나가 되어 완성된다. 만경강의 시작은 동상이지만, 완성은 삼례인 셈이다. 그래서 삼례 사람들은 만경강을 ‘한내’라고 부른다. 한내는 ‘크고 넓은 강’이라는 뜻이다. 물이 차가워 한내라고 한다지
[완주신문]“전북 전주군(현 완주군) 비봉면 소농리에 살던 이순옥은 한일합병 당시 전북 경내를 흔든 의병장 유치복의 생질로 자기 형 원옥과 함께 그 부하가 되어 그 대장 격으로 크게 활동하다 기 대장이 불행히 일본 관헌 손에 잡히자 그 단체의 운명은 다해 눈물을 머금고 각기 헤어져 유리 표박하다가 자최를 감추어 처자로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자 집에 잠복하여 있는 것을 밀정이 탐지하고 체포하야 가진 형벌을 당하고 대구지방법원으로 넘겨 15년이라는 언도를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철창생활을 해 오다 11년 만에 가출옥이 되어 지난 16일 전기 고향에 돌아갔던바 자기 형 원옥은 일찍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자기만 홀로 그리운 처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그 아내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개가했을 뿐 아니라 그 형수조차 또한 그러하였고, 자기가 살던 집은 벌써 형적조차 없어져 전북 부호 백인기 씨 소유 논이 되고 말았으므로 이 광경을 목도한 그는 끝없는 세상의 변천에 아픔을 억제하고 지난 19일(?)밤 그 동리 앞 ‘불무청리’ 주막 조성근 집에서 그날 밤을 지내던바 밝는 새벽에 가졌던 주머니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오랫동안 고민타가 오전에 이르러 그만 황천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데 그는
[완주신문]2021년 한해동안 매달 한번씩 완주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글을 썼다. 완주의 정체성을 꼽으라 하면 웅치・이치 전투로 대변되는 국난극복과 동학 농민혁명의 민중항쟁이다. 웅치・이치 전투와 동학 농민혁명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이름 없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2022년은 보통 사람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처음 소개할 영웅은 임진년(1592년) 풍전등화 앞에 서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절을 선택했던 이름 없는 의병들 이야기이다. 왜군은 1592년 4월 명나라를 치러 갈려고 하니 조선 땅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동래에 상륙하였고, 20일 후에는 한양을 함락하였다. 관군은 연전연패하고 임금은 의주 압록강 변에서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때나 전쟁이 터지면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이다. 지도자들 그 누구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데 나라를 구하겠다고 죽음의 자리에 선뜻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의병이다. 의병이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로운 병사를 말한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초이다.
완주군 이서면에 위치한 초남이성지는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복자 유항검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권상언과 함께 호남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항검의 가족 중 8명(유항검, 권신희,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 유관검, 이육희, 유중성)이 순교하였고, 이중 5명(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 유중성)이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시복이란 복자로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성인이 되기 전 단계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먼저 청원인이 대상자를 성인으로 인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서가 접수된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과 함께 가경자라고 부른다. 이후 심사를 거쳐 교황의 권한으로 복자가 되고 시성 심사를 거쳐 마침내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복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3인의 성인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의 복자가 있다. 성인은 전세계가톨릭 교회에서 축일로 기념하고 복자는 지역의 교구, 단체 등에서 축일을 기념한다. 초남이성지는 천
[완주신문]헌법 제1조 1항에 정의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은 ‘민주정’과 ‘공화정’을 함께 추구한다는 선언이다. 민주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이며, 공화정은 나라의 통치를 왕이 아니라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에서 공화정에 대한 유래는 중국의 역사서 <사기>의 ‘반란으로 임금이 없는 상태에서 제후들의 추대를 받은 사람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제왕이 다스리던 중국에서도 국민에게 주권을 위임받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다니 놀랍다. 이처럼 민주 공화정의 핵심은 주권이 백성에게 있으며, 왕이 아닌 백성이 선출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잉글랜드의 군주제를 폐지한 올리버 크롬웰을 최초의 공화주의자라 칭한다. 그러나 크롬웰보다 60년이나 앞서서 공화제를 주장했던 인물이 완주에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급진적 사상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이다. 1567년 21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
잃어버린 이름 우주현 이야기 우산정사는 우산에 있는 정사라는 뜻으로 정사는 재실의 역할 뿐만 아니라 문중 자녀들을 교육하는 서당의 역할도 함께 하던 곳이다. 우산정사는 봉동읍 제내리 제촌마을에 있다. 제내리는 방죽 안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고 제촌마을은 방죽마을,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제내리는 과거 우주현의 중심지였다. 우주현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우소저현(于召渚縣)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우주현(紆洲縣), 고려 시대에는 우주현(紆州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409년(태종 9) 이후 전주부에 편입되었다. 우(紆)는 <굽을 우> 로 구부러지다, 두르다, 감돌다 등의 의미이고, 주(州)는 <고을 주>로 고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紆州)는 고을을 두르다, 혹은 고을을 품에 안고 있다는 의미이다. 봉동의 테크노밸리 일반산업단지와 왕궁, 삼례 일부지역이 바로 우주(紆州)현 이었다. 고려 말까지 우주현은 전주부와 금마군 사이에 있었으며 치소는 익산IC 나가기 전 마지막 주유소 옆에 있는 공항버스 승강장과 주차장이 있던 곳이거나 왕궁면 동용리와 봉동읍 제내리 사이에 있는 학현산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 시대 우주현은 우북,
봉림사(鳳林寺)를 아십니까? 고산면 삼기리에 후백제시대 절터가 있다. 봉림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전해질 뿐 지방지나 사찰지 등 어떤 고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절이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봉림사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61년 당시 삼기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이승철 선생님이 5학년 아이들과 향토 연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석불 2점과 석조물 2점을 발견해 언론에 제보하면서였다. 이후 1975년 12월 전북대학교 박물관은 전주와 완주 지역의 문화재 조사를 해 『전주·완주지역 문화재조사보고서』를 발간하며 봉림사지에 삼존불, 5층 석탑, 석등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봉림사지에 해체되어 산재하던 삼존불은 삼기초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학교 정원으로 옮겨 교육 자료로 활용하다 1977년 5월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5층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시마타니가 소달구지를 이용해 자신의 농장사무실이 있는 옥구군 개정면(현재 발산초등학교)으로 옮겨갔다. 봉림사지가 출처인 또 다른 5층 석탑은 익산시 남중동 이리여고 운동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백제기법의 고려시대의 탑이라는 평가를
[완주신문]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소식을 전하던 통신제도이다. 지금처럼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전 국경의 상황을 중앙에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국가의 기반시설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봉수제도를 계승발전 시켜 활용하였는데 5개의 봉수로가 있었고 종착지는 남산이었다. 조선의 5봉수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완주에서 삼국시대의 봉수와 산성이 발견되었다. 2018년 만경강 유역인 탄현, 봉수대산 등에서 10개소의 봉수가 발견되었고 탄현봉수는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탄현 봉수는 삼국시대 관방체계의 연구를 위한 중요한 유적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도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탄현봉수를 조사한 가야문화연구소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완주-진안(금산)-장수를 잇는 봉수로 추정하고 있다. 천호산성 봉수대에서 시작한 봉수는 탄현봉수대, 운암산 봉수대를 거쳐 장수로 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봉수대는 4km의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통은 산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완주에서 발견되는 산성과 봉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건설되었을까? 완주의 제철유적지 산성과 봉수가 발견되는 주변에는 공통적으로 제철유적지가 존재한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신흥계곡의
○창암 이삼만과 추사 김정희 만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전국에 답사 열풍을 불게 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이 만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추사는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 김노경의 아들로 시쳇말로 잘나가던 금수저 사대부였다. 추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복한 집안에서 천재로 살았던 사람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주 김씨에 대한 견제로 비록 몸은 제주로 유배를 떠나지만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유배 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71세의 창암은 제자들과 함께 추사를 찾아 자신의 글씨를 보여 주며 추사의 평을 부탁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광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