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머문 골짜기 봉서골 봉서사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신록이 푸르른 계절이면 찾아가는 곳이 봉서사이다. 봉황이 깃들었던 봉서골에는 비슷한 이름의 전혀 다른 성격의 유적지가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대한민국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밀양 박씨의 재실인 봉서제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대찰 봉서사이다. 봉서제가 유교를 대표한다면 봉서사는 불교를 대표하는 셈이다. 봉서제는 두억마을에서 농촌체험시설로 숙박과 예절학교, 8대 명당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제법 성공적인 마을사업을 풀어가고 있다. 봉서제를 스치듯 지나쳐 오르면 봉서사에 닿는다. 봉서사 입구에는 봉서사에 기거 하셨던 많은 분들의 부도탑이 있다. 부도탑은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화장을 할 때 수습되는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이다. 보통은 사찰의 뒷산에 모시지만 간혹 사찰의 경내에 있기도 하고 사찰 초입에 모시기도 한다. 봉서사는 천년고찰로 이곳에서 기거하셨던 분들이 많아서인지 재법 많은 부도탑이 있다. 이 많은 부도탑 중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부도탑이 있는데 바로 진묵대사의 부도탑이다. 진묵대사의 부도탑은 해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다하여 방송 출현도 한 제법
[완주신문]인류의 출현부터 현재까지 인류는 긴 시간 동안 역사를 이룩해 왔다.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는 대표적 기준점이 ‘문자’이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여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를 활용하여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대를 역사시대라고 한다. 역사시대는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 사상 등의 보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의 역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선사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선사시대는 사용된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완주에는 초기 철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가 존재한다. 바로 용진읍 상운리유적이다. 상운리유적은 1996년 익산-장수 고속도로 완주 IC를 건설하기 위해 지표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상운리에서는 점토곽• 목관 116기, 옹관 38기, 석곽 9기, 목관묘 35기, 옹관묘 5기가 확인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발견된 분구묘 중 최대 규모로 정치・사회・문화・기술・이념 등 당시 사회체제가 압축되어 있는 ‘고고학적 아카이브’이다. 고고학적 아카이브인 상
고조선과 진국(辰國)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한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친 이유를 사기에는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서는 꾀어 낸 한(漢)나라의 망명인이 더욱 많아졌고, 또한 여전히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사기』권115, 「조선열전」55)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이 너무 빈약하여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를 비교해 보면 고조선은 중국의 한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진'이라는 나라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중계무역으로 얻어진 부는 고조선을 강국으로 만들었다. 고조선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1년 동안 한나라의 침입을 버텨낸 고조선은 지도층의 분열로 결국 멸망한다. 고조선의 강역을 요서와 요동,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이유는 이 지역에서 탁자식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반도 남부에서는 바둑판식 고인돌과 세형동검이 주로 발견된다
[완주신문]완주의 정체성 혹은 완주의 재발견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 문득 ‘완주의 선사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인류 역사에서 시대를 나누는 기준점은 문자이다.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시대를 역사시대라 한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복원한다. 선사시대는 사용한 도구에 따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구분하는데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완주에서는 구석기 혹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봉동, 구이 등지에는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어 완주의 역사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물로 경제력이나 정치력이 있는 지배계층의 무덤이다. 세계에 약 6만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4만개 정도가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은 지배계층의 무덤이기에 고인돌 아래에서 간혹 부장품으로 묻은 유물이 발굴되기도 한다. 불행히도 완주의 고인돌은 아직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발견된 부장품이나 성격이 규명된 고인돌은 없다. 완주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고인돌이 봉동읍 용암리에 있다.
피폐해진 민중 19세기 조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는 유학 정명론(正名論)의 핵심이다. 정명론(正名論)은 사람이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하면 정치는 저절로 잘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결국 신분의 차별, 직업의 귀천, 남녀의 구별 등과 연결되며 차별적인 신분 제도의 옹호로 귀결된다. 성리학을 받드는 조선사회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과 생활이 차별을 받는 사회였다. 신분이 낮으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갖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돈으로 족보와 관직을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신분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조선사회는 세금징수의 기준인 토지제도가 무너지며 삼정(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이 문란해져 빈부 격차, 독점과 특권이 심화되었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여기에 해안에는 서양의 배가 출몰하며 사회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신분차별 부정 최제우 이때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학술서적과 과학기술문물,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완주신문]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혁명군은 고산으로, 진안으로 숨어들었고 일본군은 혁명군을 추격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형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삼아 대륙을 침략할 심산이었기에 후방의 안전을 위해 혁명군을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혁명군으로 몰아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삼례에 혁명군이 모였을 때 삼례의 장정 5천명이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 토벌대 대장의 기록에 의하면 삼례에는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삼례의 집집이 한 명씩은 혁명군에 참여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당시 삼례의 모든 집에서 최소한 한 명씩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혁명군은 살기 위해 선교사에게 몸을 의탁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작은 시골에 100년이 넘는 대형교회가 많은 이유다.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면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끝까지 항쟁을 선택한 50여명은 대둔산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1895년 2월 18일 만든 보고서 ‘대둔산부근 전투상황(大芚山附近 戰鬪詳報)’에는 25명을 사살하고 50자루의 화승총, 약간의 화약, 서류를 획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후항쟁지 25명의 사망자 중에는 20대의 임산부가 있었고
[완주신문]1592년 임진왜란 개전 20여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올라갔던 왜군은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를 점령하기로 한다. 왜군은 용인, 청주, 영동을 거쳐 전라도 금산으로 진격해 온다.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전라도 관문 금산성 함락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4만의 군대를 이끌고 그해 6월 21일 닥실나루에 도착하였다. 영동에 온 일본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과 대치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해 건너지 못하고 있는 왜군 앞에 한 아낙이 치마를 걷고 나루를 건넜단다. 이 아낙은 금산 군수 권종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원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아낙 덕분에 강이 깊지 않음을 알게 된 왜군은 물밀듯이 저곡산성으로 밀려들었다. 저곡산성에서 권종과 600명의 장병은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하였고, 저곡성을 돌파한 왜군은 금산성에 무혈 입성한다. 권종은 조선개국공신 권근의 6대손으로 권율장군의 사촌형이다. 닥실나루와 저곡성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내비게이션에 금강국민여가오토캠핑장을 찍고
[완주신문]완주군은 지난달 26일 제428주기 추모식을 웅치전적비(소양면 신촌리)에서 거행했다. 428년 동안 지내온 추모 행사이지만 정작 웅치전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 역시 아이들과 역사수업을 10년 가까이 진행했지만 웅치전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 ■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외가의 친척 현덕승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이런 이유 때문에 한산도에 진을 옮겨서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호남을 방어함으로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아래 호남을 지켜냈다. 그렇다면 육군은 어떻게 호남을 지킬 수 있었을까? ■ 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 조선시대 호남의 심장은 전주였다. 전주성을 지켜낼 수 있으면 호남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혈전이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웅치에서 있었다. 웅치의 이야기는 진안의 부귀면 세동리에서 시작된다. 세동리 덕봉마을 앞을 흐르는 적래천은 조선군의 해자 역할을 하였다. 전주성을 치
[완주신문]만경강 최장발원지인 막은데미골이 있는 밤티마을에는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논두렁 눈썰매장이 있고 영농조합법인에서 운영하는 곤충체험관이 있다. 귀촌한 젊은부부가 운영하는 체험관찰학습지도 있어서 깨끗한 자연환경을 이용한 생태체험장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뜬봉샘이나 막은데미샘의 자연생태체험마을 못지 않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생태마을인 이곳이 요즘 석산을 개발한다는 소문 때문에 주민들이 긴장하고 있다. 석산개발을 막기 위해 주민 스스로 만경강 발원지 최전방 지킴이를 자처하며 ‘밤샘 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만경강 발원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런 갈등요소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밤샘일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예전의 보호구역은 수많은 제한과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었지만 환경보전구역의 지정은 제대로 지켜내면서 지혜롭게 이용하여 후손들에게 최상의 상태로 물려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한 주민들의 합의가 이뤄지고 행정에서 방법을 찾는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민의 역량이 있는 마을이니 만경강 발원지 생태마을로의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경강의 대표적 지류인 고산천은 신흥계
[완주신문]전라북도에는 발원지가 4개가 있다. 장수의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이고, 진안의 데미샘은 섬진강의 발원지이다. 뜬봉샘이나 데미샘은 생태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어서 찾는 사람도 많다. 반면 전북에서 발원하여 전북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발원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동진강의 발원지는 지금까지는 내장산의 까치샘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에 산외면 여우치(如牛峙) 마을의 ‘빈시암’이 까치샘보다 거리가 더 멀어 발원지가 되었다. 여우치(如牛峙)는 산 모양이 소 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이고, 시암은 전라도 사투리로 샘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발원지는 동상면 밤티마을의 ‘밤샘’이다. 그런데 사봉리에는 만경강의 발원지가 3곳이 있다. 먼저 율치(栗峙) 아래에 있는 밤샘(동상면 사봉리 산 115-2번지 주변)은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정한 만경강의 발원지로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원등산 밤샘이다. 이외에도 건설교통부에서 관리하는 ‘전국 하천일람표’에는 만경강의 발원지를 사봉리 산 164번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만경강 하구에서 가장 먼 곳은 밤티마을 막은데미골에 있다. 발원지의 정의는 ‘어느 하천의 하구에서 가장 먼 곳으로 물이 마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