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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정체성 찾기3]웅치전투

조선시대 호남의 심장을 지킨 전투

[완주신문]완주군은 지난달 26일 제428주기 추모식을 웅치전적비(소양면 신촌리)에서 거행했다. 428년 동안 지내온 추모 행사이지만 정작 웅치전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 역시 아이들과 역사수업을 10년 가까이 진행했지만 웅치전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

 

■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외가의 친척 현덕승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이런 이유 때문에 한산도에 진을 옮겨서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호남을 방어함으로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아래 호남을 지켜냈다. 그렇다면 육군은 어떻게 호남을 지킬 수 있었을까?

 

■ 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
조선시대 호남의 심장은 전주였다. 전주성을 지켜낼 수 있으면 호남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혈전이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웅치에서 있었다.

 

웅치의 이야기는 진안의 부귀면 세동리에서 시작된다. 세동리 덕봉마을 앞을 흐르는 적래천은 조선군의 해자 역할을 하였다. 전주성을 치기 위해 일본군 2만명이 금산에서 용담을 거쳐 진안으로 몰려왔다. 이들을 막기 위해 김제 군수 정담을 비롯한 조선군은 3개의 방어진을 친다. 제1방어진은 소정골과 작은여사리에 자리를 잡았고 지휘관은 의병장 황박이였다. 제2방어진은 큰여사리와 정자골에 진지를 구축 하였고 나주판관 이복남과 해남현감 변응정이 지휘했다. 마지막 제3방어진인 웅치에는 김제 군수 정담과 장졸 500명, 진안 의병 김재민 일가의 식솔 10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화력과 수의 열세로 제1, 제2 방어진이 무너지고 후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제 군수 정담과 진안 의병을 이끌던 김재민은 죽을 각오로 웅치에 남아 백병전을 치르기로 한다. 그 외 장졸은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남았던 김제의 장졸과 진안의 의병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전우를 죽음의 자리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나야 하는 자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지금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웅치에서 조선군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적을 맞았고 모두 장렬히 전사 하였다. 그들의 충절에 감복한 왜장은 시신을 모아 돌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 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標木)을 세웠다.

 

 

■ 웅치・이치전투로 전주성 지켜
죽을 자리에 전우를 남겨 놓고 퇴각하던 해남현감 변응정은 돌돌모퉁이(현 삼중마을 부근)에 휘하 장병 180명과 함께 매복한다. 웅치에서 격전을 치루고 기진맥진 내려오는 왜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변응정 장군과 그의 장병들 역시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결국 왜군은 목왜정이(신원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전사자를 처리하였다. 목왜정이는 목 없는 왜군의 시신이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다음날, 구진벌이(현 화심)에는 웅치에서 퇴각한 나주판관 이복남과 송광사의 승병이 지형을 이용해 아홉 번 쳐들어오는 왜군을 아홉 번 막아냈다. 결국 왜군은 목왜정이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야음을 틈타 이복남은 안덕원으로 후퇴하고 승병은 송광사로 돌아갔다.

 

마침내 안덕원(현 아중리)에서 왜군은 이정란, 황진 등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여 대승골에서 거의 전멸한다. 2만의 군사 중 살아서 돌아간 이가 수천이었다니 대승을 거둔 것이다.

 

웅치의 실패로 왜군은 이치를 넘어 다시 전주성을 공격 하는데, 이치에는 권율이 이복남, 황진 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웅치와 이치에서의 승리 덕분에 전주성을 지켜낸 것이다.

 

■ 이름 사라지며 역사도 잊혀져
그러나 우리는 웅치전투도, 이치전투도 기억하지 못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신촌리에 신작로(곰티로)를 만들었다. 쓰임이 없어진 옛 웅치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길이 사라지며 길 위에서 있었던 사건들이 잊혔고,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잊혔다.

 

지난 6월 완주군은 소양면 신촌리 일대의 웅치전적지 내 토양 분석을 통해 조선군 등의 무덤이 존재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웅치전적지 내 성황당 터 등 유적 내 토양을 분석한 결과 총 인과 총 칼슘 함량이 주변 일반토양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웅치전투 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한 무덤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이를 토대로 하면 웅치전투는 옛 웅치길(현 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과 진안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을 잇는 길)에서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옛 웅치길 주변에는 임란 당시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성황당 터와 봉화 터, 진지 터 등이 확인됐다.

 

이제 우리는 전설이 아닌 실제의 웅치전투를 되찾았다. 옛 웅치길을 복원하여 웅치전투순례길로 만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웅치전투순례길을 걸으며 웅치의 역사를 세포 속에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웅치의 정신이 완주의 정신으로 피어날 수 있다. 웅치전투순례길을 조만간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