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머문 골짜기 봉서골 봉서사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신록이 푸르른 계절이면 찾아가는 곳이 봉서사이다. 봉황이 깃들었던 봉서골에는 비슷한 이름의 전혀 다른 성격의 유적지가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대한민국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밀양 박씨의 재실인 봉서제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대찰 봉서사이다. 봉서제가 유교를 대표한다면 봉서사는 불교를 대표하는 셈이다. 봉서제는 두억마을에서 농촌체험시설로 숙박과 예절학교, 8대 명당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제법 성공적인 마을사업을 풀어가고 있다.
봉서제를 스치듯 지나쳐 오르면 봉서사에 닿는다. 봉서사 입구에는 봉서사에 기거 하셨던 많은 분들의 부도탑이 있다. 부도탑은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화장을 할 때 수습되는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이다. 보통은 사찰의 뒷산에 모시지만 간혹 사찰의 경내에 있기도 하고 사찰 초입에 모시기도 한다. 봉서사는 천년고찰로 이곳에서 기거하셨던 분들이 많아서인지 재법 많은 부도탑이 있다. 이 많은 부도탑 중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부도탑이 있는데 바로 진묵대사의 부도탑이다. 진묵대사의 부도탑은 해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다하여 방송 출현도 한 제법 유명하다.
진묵대사와 관련된 완주의 절
완주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들은 진묵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특히 이곳 봉서사는 진묵대사가 출가한 곳이며 열반에 든 곳이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진묵대사는 암기력이 뛰어나 한번 읽은 문장은 잊지 않고 모두 기억을 했다. 스승이 없어도 혼자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니 부러울 뿐이다. 책을 좋아하는 진묵대사는 대장경을 읽기 위해 종종 합천에 있는 해인사를 찾아가곤 하였다. 하루는 해인사의 대장경을 읽기 위해 제자들을 거느리고 해인사를 찾았는데 큰 불이 나서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장경판전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진묵대사가 솔가지에 물을 적셔 불을 향해 뿌렸더니 폭우가 쏟아져 불길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악산의 대원사 역시 천년고찰인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진묵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원사 위쪽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절집에서 만드는 명주 송화백일주가 전수되는 곳이다. 어느 날 대사가 수왕사에 올랐는데 동자승이 술을 거르고 있었다. 대사는 동자승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동자승은 곡주를 거르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진묵대사는 술을 좋아하여 곡차라며 즐겨 마시곤 했기에 동자승은 일부러 곡차라고 하지 않고 곡주라고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름 높은 스님이 술을 마시는 게 많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소양의 원등사 역시 진묵대사와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변산 월영암에서 수행을 하던 진묵대사가 동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따라 왔더니 폐사된 원등사의 석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서 절을 중창하고 멀리서 반짝이는 등불이라는 뜻으로 원등사라 이름 하였다. 원등사에는 진묵대사가 수행하던 석굴 법당이 있다. 석굴암이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완주에도 있다.
진묵대사 그는 누구인가?
진묵대사는 1562년 김제의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김제 만경읍 화포이다. ‘불거촌’이란 부처님이 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불거가 불개로 변하여 화포(火浦)가 된 것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변되는 시기이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백성이고 그 중에서도 약자인 아이들과 여성들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커다란 고통을 인내하는 백성들에게 대사는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의지처가 되었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유교적 입장에서 호국불교로 국가수호에 앞장을 섰다면 진묵대사는 백성들과 동고동락 하며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과 함께 살며 백성을 위로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스스로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기록이나 저술이 없음에도 백성들은 구전을 통해 진묵대사를 오늘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진묵대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는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인식되었고, 어머님께는 지극한 효자였으며 하나뿐인 여동생과는 우애가 깊었고, 온갖 신비한 도술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불자(佛者)이며 유자(儒者)이고 도인(道人)이었다. 유불선의 3개의 종교가 솥의 세 발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 서산대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봉서사 경내에는 서산대사의 시비가 있다.
비대면 관광지 가능성
포스트 코로나 시대 관광의 화두는 이야기가 있는 비대면 관광지를 찾는 것이다. 실마리만 있다면 침소봉대 하여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내는 요즘이다. 감사하게도 완주의 여러 사찰들에는 진묵대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굳이 이야기를 만들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신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엮어서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낸다면 완주는 이야기가 있는 비대면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