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신문]봄기운이 완연하다고 느낄 즈음부터 봄의 시간은 거침없이 빠르게 흐른다. 작년에 비해 일주일 정도 늦게 핀 벚꽃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꽃비 되어 흩어졌다.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팔고 있으면 봄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벚꽃이 지고 나면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꽃이 있다. 바로 철쭉꽃이다. 벚꽃은 화사함이 매력이라면 철쭉꽃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완주군에서 철쭉꽃이 아름다운 곳은 대아수목원이라 생각하고 자주 찾곤 했는데, 가까운 곳에 숨겨진 명소가 또 있었다. 화산꽃동산이다. 따스한 봄날 철쭉꽃을 보기 위해 화산꽃동산을 찾았다. 봉동읍에서 대둔산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고산 소재지를 지나 내려서 옛길을 이용해 화산으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보이는 산 풍경이 아름답다. 나무마다 우후죽순처럼 잎들이 올라와 블링 블링 눈이 부시다. 번대마을 입구에서 좌회전하면 화산면 소재지로 가는 길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도 연두색으로 물들었다. 화산면 소재지를 지나 수락사거리에서 예곡마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화산 꽃동산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이 아니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겠다. 입구에서는 숲으
[완주신문]조선 정부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동학을 그릇된 교리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교(邪敎)로 단정하며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로 인해 동학교도는 관원(官員)은 물론 토호(土豪) 세력에게 핍박과 탄압과 수탈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 지도부와 교인들은 동학교도로 지목되어 체포당하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돈을 바치는 ‘속전(贖錢)’으로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다른 고을로 도망을 하거나 피신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동학은 관의 탄압과 토호 세력의 핍박으로 종교의 자유는 물론 설 자리 마저 잃어버렸지만,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동학의 체계를 정립하고 교단의 조직을 확립하며 점차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89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하게 되었다. 날로 가혹해지는 탄압과 수탈을 계속해서 당할 경우는 동학의 존속과 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교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과 조처를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이 1883년 조선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통
[완주신문]지난번에는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큰 틀에서 설명하였다. 이번부터는 동학의 창도(創道)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긴 여정을 완주를 중심으로 차례로 연재하고자 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요 지역에 집중된다. 즉 삼례와 고산, 그리고 대둔산 등이다. ■ 동학 창도와 전라도 포교 19세기 중반, 우리나라에도 서구(西區)의 열강(列强)이 동양(東洋)을 압박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특히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던 대국(大國) 중국이 1842년 영국과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패배하고 수도 북경이 함락당하며 굴복함으로써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이 증대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 사회는 60여 년에 걸쳐 특정 가문과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弊害)로 인해 탐관오리의 부정과 부패가 일상화되어 오갈 데 없는 민중은 희망마저 잃었다. 경상도 경주의 유력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불운을 겪어야 했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음), 경주 용담정에서 모
[완주신문]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멈칫멈칫하는 것이 느껴진다.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과 새로운 계절을 갈망하는 마음이 교차하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 주변에 하나 둘 꽃이 피고,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서는 잎들이 싹을 틔우고 있는데 또 방송에서는 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도 잠시 일뿐 그렇다고 다시 겨울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루 이틀 심술을 부려보지만 이내 매서운 기세가 사르르 녹아버리고 봄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이제는 스치는 바람 속에서 훈훈한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럴 때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따라 성지 순례를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성당으로 말이다. 되재성당은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원승마을에 있다. 화산면 소재지에서 경천저수지를 지나서 몇 굽이 돌아가면 산속 깊숙한 마을 끝에 있다. 도로 상황이 좋아진 지금 입장에서 보면 저수지와 멀지 않으면서 산속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성당이 세워진 시기를 생각하면 통행이 불편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깊은 곳에 되재성당이 자리 잡았던 이유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 있다.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박해
[완주신문]20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행정 수장이 바뀜에 따라 완주군에서 추진하는 주요 사업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특히 수소특화국가산업단지는 완주군에서 제안한 대선공약 첫번째로 채택돼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소득과 삶의 질이 높은 대한민국 으뜸 행복도시’를 표방했던 완주군이 이번 대선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살펴보기 위해, 완주군에서 대선공약으로 제안했던 사업들을 살펴봤다.<편집자주> ■ 차세대 먹거리 수소산업 완주군에서 로컬푸드 다음으로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꼽는 것은 단연 수소산업이다. 이를 위해 수소특화국가산업단지 조성은 완주군의 최대 숙원 사업으로 꼽힌다. 완주군에 따르면 수소상용차와 수소 부품산업 육성을 위해 전북연구개발특구, 지역 연구기관, 수소기업 등과 연계한 수소경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수소경제 선제적 전환, 수소전문기업 경쟁력 강화, 탄소 다(多)배출 기업 무역장벽 해소를 위해서는 수소산단 조성이 필수다. 특히 완주군은 세계 최초 수소트럭 상용화와 국내에서 유일한 수소버스 생산 지역이며, 탄소복합소재를 활용한 대용량 수소 저장용기 산업 중심지다. 게다가 수소산업의 중심인 연료전지, 수소추출기, 수전해 설비
[완주신문]1894년 2월 15일, 전라도 고부 땅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群衆)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학정을 규탄하며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조병갑은 도망하였고, 관아를 점령한 군중은 봉기의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였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2개월여 동안 고부에서 농성하던 군중은 3월 13일 이웃 고을 무장(茂長)으로 이동하였고, 세력을 결집한 군중은 다시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백산에 집결하였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고부와 무장을 거쳐서 모인 것만 아니었다. 고부 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농성의 연장으로 전라도 일대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인 것이다. 이때 백산에 모인 군중은 8천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의 뜻을 밝히는 격문(檄文), 강령(綱領)에 해당하는 사대명의(四大名義),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의 군율(軍律)을 선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혁명은 같은 해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조선의 풍패지향(豐沛之鄕)이며,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완주신문]완주군 만경강은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해 동상호를 이루고 대아댐에서 잠시 머물다 안수산 아래 고산천을 굽이돌아 용진과 봉동 들녘을 가르면서 유유히 흘러 삼례읍 비비정에서 붉은 노을에 물들며 서해로 흘러간다. 전통 농업문화유산 생강으로 잘 알려진 봉동읍에는 오래전부터 봉동의 어머니 산으로 불려지는 봉실산이 있다. 필자가 완주군의 관방 통신 유적을 수년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느낀 중요한 한가지는 봉동의 봉실산을 기점으로 서남부로 넓게 펼쳐진 완주 평야가 서서히 끝이 나고 동북면으로 갈수록 험준한 산악 지형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동북면에 산이 높고 험하다보니 산성과 봉화대같은 관방 통신 관련 유적이 많고 계곡에서는 제철이나 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례 비비정 옆에는 삼례토성이 있어서 만경강을 거슬러 오는 모든 것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토성이 없어져 무심코 흐르는 강물만이 옛 성터의 흔적을 기억할 뿐이다. 둔산리 산업단지 내에는 그리 높진 않지만 배매산성이 있어서 봉실산성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익산시와 완주군의 경계에 위치한 봉동 제내리 뒷산 진천 송씨 종중산에는 학현산성이 있다. 하지
[완주신문]상관면이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지난해 무산된 줄 알았던 의료폐기물 소각장 건립이 재시도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말 업체는 사업계획서를 보완해 지난해말 다시 의료폐기물 소각장 설립을 신청했다. 하지만 전북지방환경청은 지난 3일 업체의 상관면 의료폐기물 소각장 재신청에 대해 부적격 판정을 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소각장 건립 시도 때문에 상관면 주민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에 그간 진행상황 등을 정리해 살펴봤다. ■ 격리・위해・일반 모두 처리 업체에서 계획한 소각장에서는 격리, 위해, 일반 의료폐기물 모두를 처리할 수 있다. 격리 의료폐기물은 감염병으로부터 타인을 보호가기 위해 격리된 사람에 대한 의료행위에서 발생한 일체를 말하며, 위해 의료폐기물은 조직・장기・기관・신체의 일부, 동물 사체, 혈액・고름, 배양액, 배양용기, 주사바늘, 봉합바늘, 수술용 칼날, 한방침, 폐백신, 폐항암제, 폐화학치료제 등을 말한다. 일반 의료폐기물은 혈액・체액・분비물・배설물이 함유된 붕대, 거즈 등이다. 의료폐기물은 종류별로 전용용기에 넣어 보관해야 하며, 취급 시 주의사항을 표시한다. 위험성 때문에 배출에서 소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관리를 요하며, 섭씨 4도 이
[완주신문]요즘 겨울은 예전에 비하면 따뜻해졌다고 하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응달진 곳 얼음이 좀처럼 녹을 줄 모른다. 이런 시기에는 야외 활동을 주저하게 되는데 가벼운 운동으로 기분을 전환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럴 때 부담 없이 산책할 수 있는 곳으로는 소양면에 있는 오성한옥마을도 괜찮다. 오성한옥마을은 소양면 소재지에서 송광사를 지나 위봉산성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고갯길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위봉산성 방향 계곡에 형성된 마을과 좌측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오성제를 끼고 형성된 마을을 합해서 오성한옥마을이라 부른다. 오성마을 이름은 오성제 주변의 오도재(五道峙) 마을과 위봉산성 아래 계곡을 따라 들어선 외성리(外城里)마을이 합해지면서 마을 이름 한자씩을 따서 지었다. 외성리(外城里)의 경우 1675년 위봉산성이 축조되면서 생긴 마을로 1861년 대동여지도에도 外城(외성)으로 표기될 정도로 지명도가 있었던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골목을 따라 오르면 눈에 띄는 것이 한옥 기와집이다. 2012년 완주군에서 오성마을을 한옥 관광자원화 지구로 지정하면서 달라진 모습이다. 마을 주택의 절반 정도가 한옥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가지런히 돌담을 두르고 있는 기와집이
[완주신문]2021년 한해동안 매달 한번씩 완주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글을 썼다. 완주의 정체성을 꼽으라 하면 웅치・이치 전투로 대변되는 국난극복과 동학 농민혁명의 민중항쟁이다. 웅치・이치 전투와 동학 농민혁명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이름 없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2022년은 보통 사람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처음 소개할 영웅은 임진년(1592년) 풍전등화 앞에 서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절을 선택했던 이름 없는 의병들 이야기이다. 왜군은 1592년 4월 명나라를 치러 갈려고 하니 조선 땅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동래에 상륙하였고, 20일 후에는 한양을 함락하였다. 관군은 연전연패하고 임금은 의주 압록강 변에서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때나 전쟁이 터지면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이다. 지도자들 그 누구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데 나라를 구하겠다고 죽음의 자리에 선뜻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의병이다. 의병이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로운 병사를 말한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초이다.
[완주신문]2021년을 마무리하는 12월도 숨 가쁘게 시간이 흐른다. 신년 타종식을 앞둔 초를 다투는 카운트다운은 아니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수순에 들어가면서 왠지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고 있는 느낌이다. 잠시 바쁘게 돌아가는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비봉면에 있는 천호마을이다. 천호마을을 가기 위해 고산면 어우리에서 비봉면 방향으로 들어섰다. 길 양쪽으로는 산줄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비봉면은 산골짜기에 들어선 마을들로 구성된 지역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이 있다. 그렇게 3km 정도 가면 비봉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를 지나 1km쯤 갔을까 작은 공원이 차를 세운다.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이지만 유난히 멋스러운 비봉공원 표지석에 눈이 간다. 비봉공원이 있는 곳이 천호마을이 있는 내월리이면서 달이실의 초입이다. 달이실은 옛 지명으로 한자로 표기하면 達谷(달곡)이었다. 달이실은 고구려말로 산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실제 천호마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달이실의 중심이었던 내월마을이 가장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었다. 비봉공원을 지나 3km 안쪽에 천호마을이 있다. 천호마을은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전후해서 주로 충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