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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정체성 찾기6]동학농민혁명

근현대사 관통하는 결정적 계기 ‘동학’
역사와 아픔 포기하면 사라져
어떤 역사를 물려줄지 고민해야

피폐해진 민중 19세기 조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는 유학 정명론(正名論)의 핵심이다. 정명론(正名論)은 사람이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하면 정치는 저절로 잘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결국 신분의 차별, 직업의 귀천, 남녀의 구별 등과 연결되며 차별적인 신분 제도의 옹호로 귀결된다. 성리학을 받드는 조선사회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과 생활이 차별을 받는 사회였다. 신분이 낮으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갖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돈으로 족보와 관직을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신분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조선사회는 세금징수의 기준인 토지제도가 무너지며 삼정(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이 문란해져 빈부 격차, 독점과 특권이 심화되었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여기에 해안에는 서양의 배가 출몰하며 사회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신분차별 부정 최제우
이때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학술서적과 과학기술문물,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서교(西敎)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담아 최제우가 경주에서 동학을 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주장하며 한울 공경, 사람 공경, 사물 공경의 3경을 강조하였다. 시천주 사상은 더 나아가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는 인간존엄의 가르침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존엄의 가르침은 인간관계가 상하·주종의 지배·복종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임을 자각시켰고 신분 차별을 부정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차별을 부정하며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을 반봉건적 사회개혁운동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한다는 죄명으로 1864년 대구감영에서 처형하였다. 

 

2대 교주 최시형은 ‘경’의 대상을 ‘천’과 ‘인’에서 ‘만물’로까지 확대하여 자연보호와 환경윤리로 발전시켰다. 최시형은 교단의 안정을 위해 포교에 집중하였고, 극심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교조신원 운동은 4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농민혁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주의 시작 동학농민혁명
1876년 개항과 더불어 농민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지만 지방관과 토호의 수탈은 도를 넘었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이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 교조신원운동을 벌인다. 

 

4번의 교조신원운동 중 제2차 교조신원운동이 삼례에서 있었다. 삼례집회에 모인 군중은 수천명으로 동학이 생긴 이후 처음 있는 대규모 시위였다. 그러나 합법적인 교조신원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민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동학농민들은 전국적인 봉기만이 부정부패에 찌든 정권과 외세를 물릴 수 있다고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척양척왜, 제폭구민,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한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촉발된 제1차 봉기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을 맺음으로 종결된다. 1차봉기는 신분해방을 위한 반봉건적 운동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자치를 실현한다. 

 

동학농민군을 저지할 힘이 없던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의거 조선으로 군대를 파병하는 사실을 일본에 알리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온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치뤄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백성이 감내해야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복궁을 점거하고 친일정부를 세우는데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삼례에서 일어난다. 제2차 봉기다.

 

당시 삼례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약 10만명으로 삼례사람 중에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는 일본군 장교의 기록이 있다. 당시 삼례의 역량이 10만 대군을 수용할 수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삼례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하지만 우금치에서의 패배로 지도부가 궤멸되며 흩어진다.

 

1차 봉기가 신분해방을 위한 반봉건적 운동이었다면 삼례에서의 2차 봉기는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외세 반침략운동이었다.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19세기 민중 역량이 총집결 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이었고, 3.1독립운동의 주역이다. 3.1독립운동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6년 동안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작은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된 민족민주의 정신이 항일운동과 3.1운동으로 계승되어 4.19혁명과 광주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촛불혁명을 이루었다. 

 

 

체계적 학술성과 위해 지원 필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엄청난 사건이 삼례에서 있었다. 그러나 삼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10만명의 사람이 운집했던 곳이 어디인지도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록이 있을 뿐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심도 없어서 동학관련 학술대회조차 시도된 적이 없다. 정읍에는 동학농민혁명 선양과가 있어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과 대비된다.

 

완주의 정체성을 세울 의지가 있다면 가장 먼저 선행 되어야 할 일이 완주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이다. 동학농민혁명 중 삼례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봉동 구미리에도 전봉준과 김개남이 제2차 봉기를 모의했다는 구전이 남아 있다. 공적인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구미리와 전봉준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상장기공원 비석군에는 전주 영장 김시풍의 불망비가 있다. 김시풍은 동학군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효수된 인물이다. 더구나 김개남과 같은 도강 김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시풍과 동학농민군과의 관련은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연구하여 명명백백 밝혀 억울함을 풀던지, 단죄를 하던지 해야 하지 않을까?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아픔이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역사이기에 중앙에서 연구될 가능성은 없다. 우리세대가 포기하면 우리 지역의 역사는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역의 어떤 역사를 아이들에게 물려줄지 고민해야 한다. 완주의 정체성은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동하는 지성, 연구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올해는 동학을 연구하고 논문을 쓸 수 있도록 연구자를 지원하여 체계적인 학술성과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