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진국(辰國)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한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친 이유를 사기에는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서는 꾀어 낸 한(漢)나라의 망명인이 더욱 많아졌고, 또한 여전히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사기』권115, 「조선열전」55)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이 너무 빈약하여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를 비교해 보면 고조선은 중국의 한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진'이라는 나라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중계무역으로 얻어진 부는 고조선을 강국으로 만들었다. 고조선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1년 동안 한나라의 침입을 버텨낸 고조선은 지도층의 분열로 결국 멸망한다.
고조선의 강역을 요서와 요동,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이유는 이 지역에서 탁자식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반도 남부에서는 바둑판식 고인돌과 세형동검이 주로 발견된다. 비파형동검을 발전시켜 세형동검을 만들었고, 탁자식 고인돌을 발전시켜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드는 바둑판식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의 나라가 바로 진국(辰國)이다.
완주 갈동유적
진국은 세형동검문화가 발달했던 나라이다.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보다 더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검이다. 더 나아가 잔무늬거울과 팔주령 등의 청동방울을 만들었다.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보다 발전하였기에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세형동검을 한반도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수입해 왔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세형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 전역에서 세형동검 거푸집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세형동검뿐만 아니라 다양한 청동기를 제작했던 거푸집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이 되었지만 모두 출토지역이 불분명하였다. 현존하는 다양한 유물 중에 1급 유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출토된 장소가 분명하고 학술조사 결과 발굴된 것이어야 한다.
완주 갈동유적에서 나온 거푸집은 출토지(전북 완주)와 유구성격(토광묘), 출토상태(한 개는 서있고, 한 개는 넘어진 상태)와 공반 유물까지 완벽하게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출토 되자마자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거푸집은 세형동검을 만들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거푸집 한 쌍을 묶어서 쇳물을 붓고 식으면 꺼내서 날을 세우는 작업을 하여 세형동검을 만들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세형동검 거푸집 한쪽 뒷면에 청동꺾창이 새겨져 있다. 청동꺽창은 청동과라고도 하며 ㄱ자 모양으로 낫처럼 생겼는데 손잡이인 나무를 길게 하여 말에 탄 적을 낚아 베는 무기이다. 아마 먼저 청동꺽창의 거푸집으로 사용되다가 한 쪽이 파손되자 파손되지 않은 나머지 거푸집 뒤쪽에 세형동검을 새겨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푸집 외에도 갈동유적에서는 잔무늬 청동거울도 발굴되었는데 역시 우리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갈동유적의 잔무늬 청동거울은 지름 21.2cm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 1만3000개 이상의 선을 새겼다. 간격이 머리카락 보다 얇은 0.02mm인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겨져 있어서 청동기 제작기술의 정수이다.
제작시기가 기원전 2, 3세기로 추정되는 이 다뉴세문경은 후쿠오카현 오구리시 와카야마 유적 출토품과는 하나의 틀에서 찍었다고 할 만큼 흡사하다.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잔무늬 거울은 약 60점으로, 그 중 ‘전 논산 정문경’은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고, 화순 대곡리에서 나온 정문경은 함께 출토된 팔주령, 쌍주령 등과 함께 국보 제143로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경은 잔무늬 청동거울의 고고학적 용어이다. 국보141호인 '전 논산 정문경'은 숭실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출토지역이 불분명하다. 고물상에서 논산훈련소 참호를 파다 나온 것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논산지역으로 전해진다는 의미로 '전 논산 정문경'이 되었다.
이들 정문경의 발견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청동기 제작 기술이 뛰어난 집단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발굴’로 분명하게 증명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고조선이 연나라나 한나라의 공격을 받으며 세력이 축소되는 틈을 타서 진국이라는 독립된 나라를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조선이 진국의 독립을 방관하거나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하지 못한 것은 세형동검과 같은 발전된 무기와 이들이 가진 뛰어난 청동기 제작기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주 상림리 유적
1975년 이서면 상림리에서 26점의 중국식 동검이 발견되었다. 중국식 동검은 검신과 손잡이가 붙어 있는 일체형이고 비파형 동검이나 세형동검은 검신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서 합체 시키는 방식으로 제작 방법이 다르다. 현재까지 확인된 중국식 동검은 중국 본토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상림리 유적과 같이 26점이 일괄 발견된 적이 없다.
상림리의 동검은 26점 모두 다른 거푸집에서 제작되었으며 사용하던 것도 있고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도 있으며 의례용으로 일부러 만든 것도 있다. 이처럼 누가 왜 동검을 어떻게 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검 26점을 모두 합하여 매납한 주체세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상림리 유적의 동검은 중국 남부인 오월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동검과 같은 양식이며, 한반도에서는 평안남도와 황해도, 경기도 파주와 충청남도 해미, 전라북도 익산, 전라남도 함평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림리에서 나온 중국식 동검은 기원전 3~2세기경 중국 진한교체기의 혼란기에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전횡이라는 중국 사람이 두명의 아우와 500여명의 가신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는 구전이 군산 어청도에 전해지고 있다. 전횡은 제나라 왕의 숙부로 초나라의 항우가 유방에게 패하여 자결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돛단배를 타고 3개월 만에 어청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전횡이 무리를 이끌고 바다에 표류하던 어느 날, 바다 위로 안개가 자욱 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나서 군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섬에 상륙하였고 푸른 섬이란 뜻으로 어청도(於淸島)라 불렀다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청도에는 치동묘라는 전횡의 사당이 있으며 어민들은 이곳에서 풍어제를 올리고 있다. 군산의 담양 전씨들은 전횡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상림리 유적은 초기 철기문화 최대 밀집지역인 갈동유적과 가깝다는 점과 어청도에 전해지는 전횡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도 한나라가 세워질 무렵 중국의 선진 철기문화를 가진 이주민이 뛰어난 청동기술을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과 만났고, 이들은 철광석을 찾아 만경강을 따라 완주의 동부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완주는 청동기 시대부터 최첨단 산업단지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완주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완주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완주에 사는 우리는 완주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