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 이삼만과 추사 김정희 만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전국에 답사 열풍을 불게 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이 만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추사는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 김노경의 아들로 시쳇말로 잘나가던 금수저 사대부였다. 추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복한 집안에서 천재로 살았던 사람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주 김씨에 대한 견제로 비록 몸은 제주로 유배를 떠나지만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유배 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71세의 창암은 제자들과 함께 추사를 찾아 자신의 글씨를 보여 주며 추사의 평을 부탁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광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사람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를 당한 스승을 대신하여 완당을 두들겨 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고 하니 창암이 앞을 막으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단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추사는 창암과 헤어져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동안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한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 것을 경험한 추사는 겸손해졌던 모양이다. 추사는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전주에 들려 창암을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창암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추사는 자신의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하듯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 蒼巖 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표를 쓰고는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라는 묘문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창암의 묘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다.
○초야에 묻힌 가난한 명필 창암 이삼만
창암의 고향은 정읍 내장상동 부무실이다. 부무실에는 창암의 유필각자암석과 생가 터가 있다. 그러나 유필각자암석은 훼손이 심해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전주로 터전을 옮긴 창암은 인생의 대부분을 전주 한옥마을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에서 살았다. 그래서 기록에는 전주사람 이삼만이라고 나온다. 자만동에도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말년의 창암은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상관의 공기마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다. 공기마을에는 창암의 집터가 남아 있다.
‘도장은 돌 도장은 고사하고 나무도장도 아닌 고구마 도장을 마른 인주에 찍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창암의 글씨는 아주 촌스러웠고, 좋게 말해서 향색이 짙었다.’라고 유홍준 교수는 평하였다. 민족대표로 우리나라 서화가들의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의 저자인 위창 오세창 역시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창암은 하루에 글씨를 천자씩 썼다고 한다. 벼루가 구멍이 날 때까지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창암은 노력으로 명필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명필 창암의 글씨가 뒷면에 있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앞면에 있는 금석문 3기가 완주에 있다. 하나는 구이면 백여리 ‘증동몽교관조봉대부김기종’의 묘비, 용진 녹동마을의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 봉동읍 은하리 삼암마을 ‘동지중추부사 김양선’의 묘비이다. 우리나라 금석문의 대가 전주문화원의 김진돈 선생에 의하면 한 시대를 살았던 두 명필의 글씨가 동시에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서 문화재로도 가치가 크다며 완주군과 문중에서 서둘러 더 훼손되기 전에 향토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했다.
○관광자원으로 활용
서예 동아리를 타깃으로 창암 선생의 생애와 서예사를 공부 하는 인문학 강좌와 추사와 창암 선생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답사 코스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먼저 생가 터가 있는 정읍 부무마을에서 출발하여 전주 자만동과 상관 공기마을을 거쳐 구이 평촌리 창암 묘역을 참배한다. 그리고 구이의 ‘김기종(金箕鍾)’의 묘비, 용진의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 봉동의 ‘김양선’의 묘비를 보면서 창암 선생과 추사의 글씨를 감상 한다. 마지막엔 삼례읍 행정복지센터 취미교실에서 붓글씨를 써 보는 체험으로 일정을 마무리 한다.
올해와 내년이 ‘완주방문의 해’에 특별히 차별화된 관광 상품을 판매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손안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