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鳳林寺)를 아십니까? 고산면 삼기리에 후백제시대 절터가 있다. 봉림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전해질 뿐 지방지나 사찰지 등 어떤 고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절이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봉림사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61년 당시 삼기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이승철 선생님이 5학년 아이들과 향토 연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석불 2점과 석조물 2점을 발견해 언론에 제보하면서였다. 이후 1975년 12월 전북대학교 박물관은 전주와 완주 지역의 문화재 조사를 해 『전주·완주지역 문화재조사보고서』를 발간하며 봉림사지에 삼존불, 5층 석탑, 석등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봉림사지에 해체되어 산재하던 삼존불은 삼기초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학교 정원으로 옮겨 교육 자료로 활용하다 1977년 5월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5층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시마타니가 소달구지를 이용해 자신의 농장사무실이 있는 옥구군 개정면(현재 발산초등학교)으로 옮겨갔다. 봉림사지가 출처인 또 다른 5층 석탑은 익산시 남중동 이리여고 운동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백제기법의 고려시대의 탑이라는 평가를
[완주신문]여름철에는 사람들이 물을 찾아 많이 떠난다.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서 일까? 아니면 물은 생명체의 근원이라서 고향같이 푸근하게 느껴져서 그럴까? 요즘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옛사람들도 물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여름을 보냈다. 완주에는 지금도 정자가 여럿 남아 있는데, 삼기정, 세심정, 비비정이 바로 그런 곳이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은 역시 여름 더위에는 최고였을 것이다. 입추가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한낮의 온도는 30도를 웃돈다. 그래도 입추가 지났다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의 막바지 더위를 떨칠 겸 해서 동상면에 있는 운암산(597m)을 찾았다. 운암산 위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대아호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운암산은 대아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산 중의 하나이다.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름이 걸쳐있는 바위산이다. 운암산은 1922년 준공된 대아저수지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운암산을 가기 위해 고산면을 지나 동상면 방향으로 오르면 대아저수지 전망대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이 운암산 산행의 시작점이다. 주차장 건너편 등
[완주신문]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소식을 전하던 통신제도이다. 지금처럼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전 국경의 상황을 중앙에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국가의 기반시설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봉수제도를 계승발전 시켜 활용하였는데 5개의 봉수로가 있었고 종착지는 남산이었다. 조선의 5봉수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완주에서 삼국시대의 봉수와 산성이 발견되었다. 2018년 만경강 유역인 탄현, 봉수대산 등에서 10개소의 봉수가 발견되었고 탄현봉수는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탄현 봉수는 삼국시대 관방체계의 연구를 위한 중요한 유적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도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탄현봉수를 조사한 가야문화연구소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완주-진안(금산)-장수를 잇는 봉수로 추정하고 있다. 천호산성 봉수대에서 시작한 봉수는 탄현봉수대, 운암산 봉수대를 거쳐 장수로 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봉수대는 4km의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통은 산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완주에서 발견되는 산성과 봉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건설되었을까? 완주의 제철유적지 산성과 봉수가 발견되는 주변에는 공통적으로 제철유적지가 존재한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신흥계곡의
[완주신문]잠시 주춤했던 코로나19 상황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긴장이 연속된 생활을 하면서 일상은 터덕거리고 있지만 계절은 거침이 없다. 봄인가 했는데 2021년도 절반을 지나 하반기로 접어들었다. 계절의 시계는 한여름을 가리키고 있다. 장마가 지나면서 한낮 온도가 30도를 오르내린다. 여름에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곳으로는 계곡이 최고다. 잠시 더위를 피할 겸 숲길을 거닐며 계곡을 즐길 수 있는 동상면 수만리 마애석불을 찾았다. 수만리 마애석불을 가기 위해 전주 방향에서 출발하는 경우 소양면 소재지, 송광사, 위봉산성을 지난다. 위봉산성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입석마을이 나온다. 입석(立石)마을은 수만교회 뒤편 산 중턱에 바위가 우뚝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끝날 즈음에 왼쪽에 들꽃세상 카페가 보인다. 카페 앞을 지나면 다리(입석교) 입구에 수만리 마애석불 안내 표시가 있다. 이곳이 수만리 마애석불 가는 길 시작점이다. 입석교를 건너서 밭 사이로 난 좁은 수로를 따라간다. 수로 위에는 시멘트 덮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 길 역할을 하고 있다. 수로를 지나면 숲길로 이어진다. 입구에서 보았던 이정
[완주신문]“천년된 큰 나무로 만든 목공예 작품 4점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전국에 이곳밖에 없다.” 상관면에서 태어나 평생 나무를 만지며 살아온 최덕순(62) 작가는 이를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 최덕순 작가의 작업실과 전시실에 들어서면 맨 먼저 서낭당 나무를 연상케 하는 큰 나무로 만든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7m, 둘레 5m를 육박하는 작품은 규모만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12년 전 충남 해미군에서 가져왔다는 이 나무는 작업 시간만 18개월이 소요됐다. “이 작품에만 매진에서 1년반만에 완성했지 다른 작업이랑 함께 했으면 3년은 걸렸을 것이다.” 최덕순 작가는 “돈은 새로 벌 수 있지만 나무는 세월이라 새로 구하기 어렵다”며, 나무에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작품을 잘 팔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최 작가가 보유한 작품의 수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고, 초대형 작품 보유는 첫 번째다. “전국 어디를 가도 초대형 목공 작품을 1개 이상 가지고 있는 곳을 보기 힘들다.” 어릴 때부터 팽이, 썰매, 지게 등을 직접 만들었다는 최덕순 작가. 중학생 나이에는 본인이 만든 지게를 동네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다. 나무 만지
[완주신문]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아무래도 더위가 신경 쓰인다. 더위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열치열(以熱治熱, 열을 열로 다스린다는 의미)도 괜찮은 것 같다. 그래서 가볍게 운동할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하려 한다. 완주의 여름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고종시 마실길이다. 고종시 마실길은 2개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봉산성에서 시작해서 위봉폭포를 거쳐 학동마을까지 가는 1구간과 학동마을에서 대부재를 넘어 거인마을까지 가는 2구간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고종시 마실길 1구간으로 시작은 위봉폭포에서 하려 한다. 위봉폭포 앞에는 간이 주차장이 있고, 원점 회귀가 가능해 편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위봉폭포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에 서면 멀리 위봉폭포가 보인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폭포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위쪽은 가늘고 길게 뻗어 있고, 아래쪽은 굵고 짧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침 물이 풍부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고종시 마실길은 폭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길가에는 싸리꽃이 피기 시작했다. 늘어진 가지마다 잔잔하게 달려 있는 보랏빛이 숲 색깔과 잘 어울린다
[완주신문]완주군 대표 브랜드 로컬푸드. 이를 현실화 시키는 상징적 존재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의 내홍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 소멸 위기까지 고조됐다. 이에 대한 해법을 듣고자 오래전부터 완주군 농업경영인연합회장, 친환경농업인연합회 사무국장 등 농업관련 단체에서 활동을 해오고, 지금은 완주군의회에서 일하고 있는 임귀현 의원을 만나봤다. ▲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 내홍이 안타깝다. 어떻게 보는가? - 완주군의원 이전에 농민의 한사람으로서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관 주도형에서 조합원 스스로 생산에서 판매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결정해야하는 협동조합으로 전환되는 과도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는 떨쳐버리고 미래만 보고 가길 바란다. 갈등은 농민과 소비자 보호를 위한 고민과 서로 다른 해법을 위한 논쟁이라는 긍정적인 과정으로 여기고 지혜롭고 현명하게 해결할 것으로 믿고 있다. ▲ 최근 로컬푸드협동조합이 운영하던 직매장을 완주군에 일괄 반납하려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는 조합 해산과 같다고 주장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 로컬푸드협동조합 내에서 진행됐던 일이기에 외부에서 과정
○창암 이삼만과 추사 김정희 만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전국에 답사 열풍을 불게 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이 만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추사는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 김노경의 아들로 시쳇말로 잘나가던 금수저 사대부였다. 추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복한 집안에서 천재로 살았던 사람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주 김씨에 대한 견제로 비록 몸은 제주로 유배를 떠나지만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유배 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71세의 창암은 제자들과 함께 추사를 찾아 자신의 글씨를 보여 주며 추사의 평을 부탁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광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사
[완주신문]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 김윤주 이사는 31일 완주군청 앞에서 “로컬푸드협동조합을 지켜달라”며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로컬푸드협은 이사장 선출 등을 둘러싸고 수년째 내홍을 겪어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조합에서 운영하던 직매장 4곳을 한꺼번에 완주군에 반납하려는 안건을 두고 대의원총회에서 소동을 빚기도 했다. 김윤주 이사에게 1인 시위에 나선 이유를 물었다. ▲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을 지켜달라는 1인 시위벌이고 있는데, 로컬푸드가 위협받고 있는가? - 오는 7월 중순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던 직매장 모악점에 대한 계약기간이 만료된다. 올초 혁신점은 경쟁입찰을 통해 운영권을 완주공공급식센터에서 가져갔기에 이번에도 같은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완주군에서 조합 내홍을 이유로 나머지 4개의 직매장을 순차적으로 공공급식센터로 넘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0년 가까이 천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농사짓는 시간을 쪼개 교육을 받고 회의를 하며, 어렵게 일군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을 이렇게 사라지게 보고만 있을 수 없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런 간절한 애타는 목소리가 행정에도 전달되길 바
[완주신문]벚꽃이 흩날리고 나면 산은 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겨울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겨우내 건조했던 풍경에 생기가 돌면서 촉촉함이 묻어난다.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특별히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 시기는 무엇을 해도 잘 어울린다. 코로나19로 활동에 제약을 받는 언택트 시대에는 드라이브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연둣빛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은 최고다. 가다가 잠시 내려 산책도 겸할 수 있는 코스라면 금상첨화겠다.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송광사와 위봉폭포로 이어지는 길이 바로 그런 코스다. 완주군 송광사로 가는 길은 벚꽃 터널로도 유명한 곳이다. 주변에는 BTS가 다녀가면서 더욱 유명해진 오성한옥마을과 카페들이 있어 계절에 관계없이 많이 찾는 절이다. 송광사에서는 한창 부처님 오신 날 준비에 바쁘다. 보통 절에서는 마당에 줄줄이 등을 다는 것이 익숙한 풍경인데, 송광사에서는 등으로 탑을 만들었다. 절 바깥에도 있고, 절 안쪽으로 들어가면 절 마당에도 등탑이 여러 개 있다.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당가에 핀 하얀 목단이 참 곱다. 어느 꽃송이는 살짝 분홍빛이 감돌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순백이다. 송광사 안에는 목단
봉황이 머문 골짜기 봉서골 봉서사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신록이 푸르른 계절이면 찾아가는 곳이 봉서사이다. 봉황이 깃들었던 봉서골에는 비슷한 이름의 전혀 다른 성격의 유적지가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대한민국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밀양 박씨의 재실인 봉서제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대찰 봉서사이다. 봉서제가 유교를 대표한다면 봉서사는 불교를 대표하는 셈이다. 봉서제는 두억마을에서 농촌체험시설로 숙박과 예절학교, 8대 명당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제법 성공적인 마을사업을 풀어가고 있다. 봉서제를 스치듯 지나쳐 오르면 봉서사에 닿는다. 봉서사 입구에는 봉서사에 기거 하셨던 많은 분들의 부도탑이 있다. 부도탑은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화장을 할 때 수습되는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이다. 보통은 사찰의 뒷산에 모시지만 간혹 사찰의 경내에 있기도 하고 사찰 초입에 모시기도 한다. 봉서사는 천년고찰로 이곳에서 기거하셨던 분들이 많아서인지 재법 많은 부도탑이 있다. 이 많은 부도탑 중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부도탑이 있는데 바로 진묵대사의 부도탑이다. 진묵대사의 부도탑은 해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다하여 방송 출현도 한 제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