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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민주주의

[완주신문]“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야. 눈을 감아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나드가 텅빈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한 말이다. 영화에서 레나드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는데, 그의 기억의 임계점은 10분이다. 무엇을 하든 1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억 세계를 최대한 연장하기 위해 경험의 표식들을 사방에 남긴다. 그러나 그 표식들을 따라감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누수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단기기억상실증이 자기내면의 문제라는 점에서 치유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구원 가능성을 설정한다. 여기에서 감독이 주목한 것은 레나드가 가진 기억의 진실성이 아니라, 그 기억이 레나드의 삶을 어떤 식으로 왜곡 하는가이다.

 

21대 국회는 출범 과정부터 범상치 않았다. 의석수 분배문제를 두고 여야는 상호비방과 온갖 협작으로 불쾌한 정치풍을 형성하더니, 정치개혁특위까지 발동시켰다. 민망해서 언급하기도 곤란한 추태들 끝에 대략 50cm에 달하는 기형적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탄생했다.

 

이번 총선에 대한 완주군의 열기도 대단했다. 후보자간에 공방도 치열했지만 지지 후보자를 향한 유권자들의 관심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뜨거웠다. 메시지로 지인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찍어줄 것을 호소하는가 하면, 상대 후보의 악담을 쏟아놓기도 했다.

 

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정치 투쟁을 벌였을까? 당선자는 유세에서 펼친 공약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할까? 이후 유권자들은 21대 총선에 대해 어떻게 기억할까?

 

21대 총선 이전까지 존재했던 과거 정치권의 행보는 레나드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레나드의 단기기억상실증이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생긴 심리적 병이라면, 정치인의 단기기억상실증은 극단적인 자기애로 인한 병폐라는 점에서 다르다. 원인이야 어쨌든 둘 다 삶을 왜곡시킴으로써 전후를 잇는 총체적 사고가 불가능해 문제가 발생한다.

 

레나드는 10분 전의 과거를 잊어버려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친족 살해라는 상황에 봉착했다. 이로 인해 위기에 빠진 레나드는 자기행위의 정당화를 위해 단기기억 속에 갇혀있는 진실을 왜곡한다. 정치인은 투표가 끝나는 순간 자기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라는 신념을 무참히 살해한다. 이로 인해 민주 정치의 기본정신마저 왜곡된 사태에 이르렀다. 정치인들은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 사회적 재화와 관련된 정보를 독점하는가 하면, 당면한 과제를 모른척하기도 한다. 심지어 국민을 능멸하는 사기를 치기도 한다. 간간이 다른 사례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 악순환은 1948년 5월 총선 이래로 지속되어왔다. 이렇게 잊혀진 유권자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만 다시 기억된다. 그간 유권자들의 기억력 역시 신통치 않았다. 지역마다 뚜렷한 당색은 매번 재현되지만 왜 그 당과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권자는 드물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자가 공약을 잘 지켰는지, 어떤 정치인이 공정한 정의를 실현한 인물인지 평가해야한다는 사실을 늘 망각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정치 상황에 늘 황망해 하지만 유권자로서 권리가 주어질 때마다 ‘그 분노’를 잊었다.

 

그러나 레나드 말처럼 유권자가 그 분노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눈을 감아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서 생긴 정치적 사태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잘 사는 전북, 고용촉진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그 허망한 약속은 할랄 생산업체 유치 무산과 태양광 업체 파산에도, LH 공사의 유치 계획이 무산될 때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약속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레나드의 단기기억상실증이 자기 보전의식에서 근거한 심리적 병증이라는 점에서 치유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치인의 단기기억상실증 역시 자기애라는 자기 보전의식에서 나온 것임으로 치유가능하지 않을까? 21대 총선이 막 끝나 현 시점부터 민주 정신의 왜곡을 막는다면 단기기억상실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도착적인 자기애로 인한 병증이 재발하여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라는 신념이 사라질 기미를 느낀다면, 중요한 표식들을 남겨 스스로를 일깨워야한다. 후보자들의 맹세와 공약 그리고 그날의 추태들을 유권자가 날선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번 선거에서 벌인 총체적 난국을 다시 재현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