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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선수로9]우리나라 최초 저수지 황등호

[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해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황등제 
황등호는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었던 인공 저수지이다. 황등호의 둑(堤防)은 마한 기준왕 때 또는 백제 때 쌓았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황등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에 330년(흘해이사금 21) 김제 벽골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벽골제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저수지로 알려져 왔다. 2021년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옛 황등호 둑 일부에서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하단부에서 채취한 목재와 부엽층 및 흙 등을 방사성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기원전 400~3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결과 익산 황등제는 김제 벽골제보다 600~700년 먼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로 알려졌다.

 

◎황등제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조선 전기에 상시제, 조선 중기에 상시연, 조선 후기에 황등제, 구교제, 동제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요교제, 요교호, 임익수리조합저수지, 황등호, 황등저수지로 불렀다.  

 

조선 전기에 출간된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보이는 전주 상시제(上屎堤), 하시제(下屎堤)와 익산 상시제(上屎堤)는 황등제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기록된 익산 상시연(上矢淵)은 황등호이다.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한 금마지(1756년)에 상시연은 위아래로 못이 있었는데 거의 메워졌으며 세속에서는 번지(藩池)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위아래 못은 세종실록지리지의 상시제와 하시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문헌 동국여지지(1656) 전라도 익산군 산천에 황등제호(黃登堤湖)는 군 서쪽 22리 함열현 경계에 있으며 구교제(龜橋堤)라고도 한다고 기록하여 황등제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반계수록(1670), 성호사설(1760), 운호집(1817), 여유당전서(1818), 대한신지지(1907)에 황등제(黃登堤)로 기록하고 있다. 정조실록(1798), 승정원일기(1798), 일성록(1798), 비변사등록(1798), 승정원일기(1806)에 반계수록을 인용하여 황등제(黃藤堤)로, 승정원일기(1819), 비변사등록(1819)에 황등제(黃藤堤)로 기록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1770)에 황등제호는 구교제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증보문헌비고(1908)에 황등제는 구교(龜橋)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한편 승정원일기(1731), 김약려가 임피현에 올린 진정서(1837), 전라북도 봉세관이 내장원에 보낸 보고서(1901), 전주군 서일면(현 익산군 오산면) 주민이 내장원에 보낸 청원서소장(1903)에 동제(銅堤)가 보인다. 승정원일기에 동제는 전주 익산 함열 경계에 있다 하여 황등제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황등호의 둑은 전주군 북일면에 위치하였고 호수는 전주군 북일면, 익산군 지석면, 두천면, 율촌면, 사제면, 함열군 남일면에 접하고 있었다. 여유당전서 목민심서(1818)에 “우리나라의 저수지는 모두 빈 들판 안에 있어서 감시하고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 몰래 둑을 허물고 허락 없이 저수지 땅에 농사를 짓기도 한다. 시체가 걸려 있기도 하고 빈장이 그냥 머무르기도 하며 똥과 오물이 섞여 있으니 역시 고쳐야 할 더러운 풍속이다”라고 했다. 

 

상시제, 하시제, 상시연, 동제는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시기에 따라 방치된 저수지에 똥과 오물이 섞여 있어 똥(屎)의 뜻을 빌려 한자로 상시제(上屎堤)와 하시제(下屎堤)로, 똥을 기피하기 위해 상시연(上矢淵)으로, 똥의 소리를 빌려 한자로 동제(銅堤)라고 기록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최근 일부 논문이나 기사에서 요곶제(蓼串堤)를 황등제로 비정하는 경우가 있다. 1789년부터 1899년 사이에 간행된 9종의 익산군읍지에 요곶제가 기록되어 있다. 위치는 군의 서쪽 10리(4.45km), 주위 1,113자(230m), 깊이 6자(1.24m)라 하였으며, 금마지(1756)에 미륵면에, 조선지지자료(1911)에 익산군 미륵면 동변리에 있다고 하였다. 요곶제는 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401에 있는 향산제이다. 면적 13,897㎡(4,204평)의 작은 방죽이다. 

 

1909년 임익수리조합설립인가서에 요교제(腰橋堤)저수지와 요교호(腰橋湖), 전주평야수리조합계획안에 요교점언제(腰橋店堰堤)를 기록하여 요교제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1910년부터 1936년 논으로 개간하여 저수지가 폐지될 때까지 각종 문헌에 요교호, 요교제, 임익수리조합저수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발행한 신문의 기사 30건 중 요교호 11건, 요교제 7건, 요교강 1건, 황등호 2건, 황등지 2건, 황등저수지 3건, 임익수리조합저수지 4건으로 나타나 요교제는 일본인들이 사용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몇 해 전 전북지역의 한 일간지에 <‘황등제’라는 명칭보다 ‘요교제’라고 널리 알려져왔다>라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황등제의 보수
백제, 신라 시대의 황등호의 모습과 보수 여부는 기록이 없어 가늠할 수 없다. 

 

고려 말인 1390년에 39살의 권근(權近, 1352~1409)이 황등호 가의 꿈고지 마을 양촌대에서 입학도설(보물 1136호)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꿈고지 마을은 황등호를 향해 언덕이 길게 늘어진 곶으로 현재 익산시 임상동 몽곶(夢串) 마을이다. 2015년 10월에 익산시 임상동 622-24에 양촌권근선생유허비를 세워 옛 양촌대의 흔적을 알리고 있다. 금마지(1756)에 익산의 아름다운 경치 양촌대(陽村臺)는 “군의 서쪽으로 15리 떨어진 몽곶 마을 뒤의 작은 구릉에 있다. 대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40리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다. 양촌 권근이 익산군에 유배되었을 때 이곳에 정자를 짓고 즐기면서 쉬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가 무너져 없기 때문에 양촌대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390년 당시 양촌대 앞 황등호에 물이 얼마나 고여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2023년 7월 14일 장대비가 내리던 날 꿈고지 마을 앞까지 물이 가득 차 바다처럼 넓은 황등호의 옛 모습이 재현되는 듯 하였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상시제와 하시제를 기록하였고, 1756년 남태보(南泰普, 1694~1773)의 금마지에 상시연은 위아래로 못이 있다 기록하여 황등호는 위아래로 두 개의 방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56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동국여지지에 황등제호는 둑이 900보(1.11km), 둘레가 25리(11.14km)이나 둑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 사람들이 논밭으로 일구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황등호 일부가 모경지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1662년 1월 26일 비변사등록(현종 3)에 진휼청에서 16조에 달하는 제언사목을 반포하여 각 도에 내려보내 둑을 고쳐 쌓도록 독려하였으며, 전라감사 이태연(李泰淵, 1615~1669)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던 도내 방죽의 둑을 고쳐 쌓아 전주의 옥야(沃野)가 옥토로 변하여 소득이 1천 3백여 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황등제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옥야현의 논이 옥토로 변했다는 점으로 보아 이때 황등제도 보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1731년 5월 6일 승정원일기(영조 7년)에 1711년(숙종 37)에 진휼청에서 감관을 보내 물력을 많이 써서 보와 둑을 쌓아 전주와 임피 지역의 비옥한 평야에 물을 대어 백성들이 혜택을 받게 한 뒤에 세를 거두어 진휼에 보탤 자원으로 삼았다고 가록하였고, 1725년 2월 10일 승정원일기(영조 1년)에 1721년(경종 1)에 진휼청에서 한산에 사는 김홍적에게 전주와 임피 등지에 제방을 쌓게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고 5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대부분 끝내지 못하였다 하였고, 1722년 10월 7일 승정원일기(경종 2)에 수어청에서 자금을 대어 황폐해진 전주, 익산, 함열, 임피 4읍의 경계에 있는 들판에 물길을 파고 정리하여 이곳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세를 수어청에서 사용하자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은 황등제 보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731년 5월 6일 승정원일기(영조 7)에 방죽 안에서 함부로 경작하는 농민들이 물이 불어 넘칠 때마다 둑을 허물어 물을 터놓으니 엄히 금하고 특별히 감관에게 방죽을 단단히 고쳐 쌓도록 하여 흐르는 물이 새지 않게 하였다고 기록하여 동제를 보수하고 모경을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1781년에도 황등제를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황등제 개축공사 중 높이 160cm, 지상 높이 120cm, 폭 33 cm의 돌비석이 발견되었다. 한 면을 갈아 화주승 이름과 시주 이름 및 건립 년월을 오목하게 새겨 넣었다. 내용이 없어 비석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황등제를 보수하고 시주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 1454-1번지에 돌비석을 세워 놓고 요교비(腰橋碑)라 하고 있다. 요교비보다는 황등제비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1798년 11월 30일 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정조 22)에 복태진(卜台鎭, 1789~?)이 호남 지방 3대 제언인 눌제, 벽골제, 황등제를 수리할 것을 상소하였다 하였고, 1819년 12월 11일 비변사등록(순조 19)에 도승지 이지연(李止淵, 1777~1841년)이 각처 제언의 조사와 수축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황등제를 보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1789년부터 1899년 사이에 펴낸 7종의 익산군읍지 제언 조에 제시된 26개의 제언 목록에 황등제가 없으나 교량 조에 면천교(綿川橋)가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말부터 황등호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지만 방죽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천교는 당시 익산군 율촌면 안고잔(內化) 마을에서 율촌면 차하(次下) 마을 사이의 황등호 허리에 있던 다리이다. 

 

◎황등제의 모습
1856년 무렵 만든 동여도를 비롯하여 대동여지도, 대동방여전도에 황등제를 주기하고 작은 타원으로 그려 넣어 황등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1872년 지방지도 익산군지도에 황등호와 잘룩한 허리에 면교를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축척 약 1:11,500-20,000 정도인 이 그림지도에서 호수를 강조하여 기형적으로 크게 그렸다. 

 

1895년에서 1899년 사이에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비밀 측지 제작하여 1911년 발행한 조선약도 만경도엽에 황등호와 다리가 표시되어있고 다리 옆에 면교(沔橋)를 주기하였다. 지도에서 황등호의 모습은 위아래 양쪽 끝은 넓고 허리는 가늘어서 마치 요고(腰鼓) 처럼 보인다. 또한 황등호 허리에 놓인 면천교를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두 개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1년 2월 익산군수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黙, 1834~1906)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임피를 거쳐 율촌면 면교점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익산군수 직무대행를 맡고 있던 안익환(安翊煥, 1861~?) 고산군수로부터 익산군 관인을 인계받았다. 내화점막(內花店幕)이라고도 하는 면교점은 익산군 관아에서 임피, 함열로 가는 길목인 면천교 동쪽 안고잔 마을에 있었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황등제는 방치되거나 고쳐 쌓기를 반복하면서 1910년 임익수리조합에서 개축할 때까지 호수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황등제 개수와 수리시설 공사 
1909년 2월 1일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 등이 대한제국 탁지부로부터 임익수리조합 설립을 인가받고 1910년 2월 1일 황등제 개수 및 수리시설 공사를 시작하였다. 무너진 둑 2곳을 고쳐 쌓아 길이 1.3km로 확장 복구하였다. 동국여지지에 둑의 길이가 1.11km라 하였으니 대략 200m 정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둑의 남단과 북단에 갑문을 설치하고 남쪽 갑문 주위에 물나눔둑(分水堰)과 길이 54.5m의 무너미둑(溢流堰)을 만들었다.

황등호의 수원은 면천(綿川)과 두천(豆川)이었다. 면천은 미륵산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미륵면, 사제면, 구문천면, 율촌면을 거쳐, 두천은 미륵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미륵면, 두천면, 지석면을 거쳐 황등호로 들어온다, 지금은 면천을 기양천, 두천을 탑천으로 부른다. 

 

미륵산에서 나오는 물로는 부족하여 고산천 물을 황등호로 끌어들였다. 당시 전주군 삼례 비비정 상류 약 545m 지점의 고산천에 제방을 쌓고 비비정 취입구 갑문에서 시작하여 익산군 춘포면 시목, 쌍남 남쪽, 어전 북쪽, 오산 신방다리 옆, 문덕 앞, 두천면 돌바위, 밀메, 조산, 중촌, 용지, 북일면 양지 마을을 거쳐 동영 마을 동남쪽 황등호까지 폭 2.7m, 길이 12.15km의 도수로를 뚫었다.

도수로가 지나가는 하천에는 잠관을 설치하고 터질목에 굴을 뚫었다. 익산군 두촌면 오산마을 앞 도천과 궁평천이 합류하는 지점 아래 내경 1.52m, 길이 118.2m의 익산천잠관, 익산군 두천면 돌바우마을 앞 당산천에 내경 1.52m, 길이 25.45m의 당산천잠관을 설치하고, 익산군 북일면 신흥리 392와 393번지에서 익산군 북일면 어양리 67와 68번지 사이에 길이 672.7m의 용지터널을 뚫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익산군 춘포면 천동리에서부터 용연리까지 익산천을 새로 뚫는 공사를 함에 따라 1932년 익산군 춘포면 인수리에 새 익산천을 가로지르는 길이 131m의 철근콘크리트 잠관을 설치하였다. 황등호 둑 아래 서남쪽 들에 간선수로 약 30km, 소수로 약 177km를 설치하였다. 

 

공사비는 박기순의 전주농공은행에서 20만원을 3년 거치 15년 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아 충당하였다. 당시 20만원은 80kg짜리 쌀 3만8462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2023년 쌀값으로 환산하면 대략 80억원 정도에 해당된다. 공사비 중 둑을 고쳐 쌓고 갑문 등을 설치하는 비용으로 17%, 터질목 터널 굴착 비용으로 17%, 비비정-황등호 도수로 개설 비용으로 22%, 황등호 아래 간선수로 및 소수로 개설 비용으로 30%를 사용하였다. 

 

◎황등호의 수혜자
황등호 둑 아래 서남쪽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 북일면 신용리, 현영리, 만석리, 오산면 오산리, 남전리, 신지리, 영만리, 장신리,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금암리, 화등리, 서수리, 임피면 영창리, 월하리, 성산리 접산리, 죽산리 등 18개 리의 들에 간선수로 약 30km, 소수로 약 177km를 통해 여의도 10배 면적인 29.20㎢(8,835,500평)의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다. 당시 익산군 북일면 보삼 가다기리(片桐)농장, 남일면 신기 모리타니(森谷)농장, 남이면 오산 후지모토(藤本)농장[불이전북농장], 서일면 학곤 사나다(眞田)농장, 임피군 동이면 서수 가와사키(川崎)농장[이엽사농장], 남사면 접산 가이(甲斐)농장 등 대규모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황등호의 물은 임익수리조합의 조합원이 물세인 조합비를 내고 사용하였다. 1909년 임익수리조합 설립 당시 조합원 850명 중 일본인 21명(2.5%), 조선인 829명(97.5%)이었다. 1910년 300평당 22원이던 조합비가 1923년 79원, 1926년 90원으로 4배 이상 올랐다. 전익수리조합의 조합비 300평당 40전에 비교하면 200배 이상의 과도한 물세를 부담해야 했다. 이에 따라 이리 부호 김화형, 백락종 등 많은 사람들이 수리조합구역에 있는 농지를 방매하였다. 1928년 조합원 669명 중 일본인 157명(23%), 조선인 512명(77%)이었으나 소수의 일본인이 농지의 80%를 차지하고 있어 황등호 수리시설의 수혜자는 일본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최대의 담수호 황등호  
1911년 5월 31일 황등제 개수 및 수리시설 공사가 완공되어 당시 익산군 북일면, 율촌면, 사제면, 지석면, 두천면, 함열군 남이면에 걸쳐 둘레 31.12km, 수심 2~3.9m, 저수량 약 200만톤, 면적 8.76㎢(2,649,900평)로 여의도 크기의 3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 1918년 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3대 담수호는 익산군 황등호, 함경북도 무산군 백두산 천지(7.74 ㎢), 함경북도 경성군 장연호(7.42 ㎢) 순이었다. 황등호는 조선에서 제일 큰 담수호로 기록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토지를 수용하여 소류지를 만들어 둘레 39.12km, 면적 10.12㎢(3,061,300평)에 이르렀다.

 

◎남조선의 명승지 황등호
황등호는 논에 물을 대는 역할 외에도 물고기양식, 물고기 잡기, 새 사냥, 달맞이, 여름 피서, 뱃놀이, 겨울 철새 조망 등을 즐기는 조선 남쪽의 명소로 알려졌다. 

 

1915년에 간행한 이리안내에 요시무라 슈쿠죠(吉村肅三)와 가다기리 가주죠(片桐和三)가 황등산에 벚꽃 500그루를 심어 벚꽃의 명소로 가꾸었다 하였으며, 미에 히데후미(三枝英文)는 황등호에 내려 앉는 기러기의 풍경을 시로 읊어 이리팔경으로 소개하였다. 

 

1918년 가다기리가 주도하여 황등양어조합을 조직하고 황등호에서 물고기를 양식하여 황등장에 내다 팔아 약 3,000원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1919년에는 자본금 22,000원을 투자하여 임익양어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또한 가다기리는 배 4척을 주문 제작하여 유람선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1년 음력 사월초팔일에 황등면장 일행 14명이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혀 9명이 빠져 죽기도 하였다. 1925년 6월에 일등비행사 장덕창이 황등호에서 수상비행을 하여 이리에서 부터 황등호 일대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였다. 1928년 4월에 황등산에 있는 황룡사에서 대규모 수륙제를 거행하였고, 1929년 4월에 이리고등여학교 학생 300여명 황등호로 원족을 가기도 하였다. 가뭄에도 말라본 적이 없던 황등호가 1929년 8월과 1935년 8월에는 희대의 가뭄으로 물이 말라 매일 수천 명씩 몰려와 물고기를 잡자 구경꾼과 장사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주점과 임시 막사가 생겨 일대가 어시장(波市坪)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 1930년 7월에는 860mm의 장대비가 내려 황등호 일대가 물바다가 되기도 하는 등 명승지 황등호에 얽힌 일화들을 남겼다.  

 

◎황등호 폐지  
1930년에 들어서 완주군에 저수지를 신설하여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황등호를 논으로 개간하려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1933년 5월 4일 경천저수지 신설 공사가 인가되어 6월 20일 완주군 화산면 운제리와 운선면 성북리 옥포 사이에 둑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2월 21일 완공되었다. 

 

1936년 3월 29일 임익수리조합 평의원회에서 황등호 개답 공사를 결의하고 10월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3월 공사를 마쳤다. 이에 따라 황등호 터에 900여 정보의 논이 들어섰다. 1937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600정보의 개답지를 1인당 1~4정보씩 경매에 부치고 나머지 개답지는 이리농림학교 실습답, 전라북도 농사시험장 황등시험지, 경천저수지 수몰민에게 분양하였다.  

 

이로써 1911년 5월 31일 황등제 개수 및 수리시설 공사가 완공된 이래 1936년 10월까지 26년의 요교호 역사는 둑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익산 황등제는 기원전 400~300년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둑이요 황등호는 최초의 인공 호수이다. 전라도를 호남으로 부르는 까닭은 세 개의 큰 호수인 황등제, 벽골제, 눌제가 있기 때문이다. 요교제 요교호는 일본인들이 27년간 붙였던 이름이다. 400여년 동안 사용했던 황등제 황등호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수는 1937년에 완전히 없어졌지만 둑은 익산시 신용동 1275-9번지에서 황등면 황등리 93-16번지 사이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23번 국도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및 근대 농업수리시설의 효시이자 대표 유적으로, 호남 유래 역사의 유적으로 기리기 위한 여러 대책을 세우고 조속히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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