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후원하기

[대간선수로7]대간선수로 중계점이자 시작점 '독주항'

[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해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독주항(犢走項)은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마천 마을 남단 마천제수문에서 후정리 후상 마을 남쪽 후정제수문까지 약 1100m 길이의 물길(水路)이다. 1980년대 후반 약 550m 구간을 복개하여 체육공원과 산책길로 사용하고 있어 지금은 물길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독주항은 대간선수로의 중계점이자 시작점이다. 고산천 어우취입수문에서 후정제수문에 이르는 15km의 물길을 제1도수로라 부른다. 후정제수문에서 옥구읍 어은리 옥수저수지 양수장까지 약 48km의 물길을 대간선수로라고 한다. 

 

대간선수로는 1912년 임익남부수리조합에서 설치한 이래 1923년 익옥수리조합에서 옥구저수지까지 확장하였다. 1989년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24년 동안 개수와 보수를 계속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독주항 이름과 유래
독주항수로는 1780년(정조 4) 무렵에 삼례 부자 백대석(白大錫) 또는 배(裵)씨가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발 고도 40여 m의 호산(湖山)과 30여 m의 여시코빼기 언덕 사이의 골짜기에 땅파기 공사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꿈에 송아지가 나타나 달려간 곳으로 땅을 파내 간신히 완성하였다는 일화가 있으며 이 까닭으로 독주항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독주항 돌지장
1921~1923년 대간선수로 확장공사 때 금반마을 앞에서 돌부처상[石地藏]이 발견되어 제사를 지내고 후정리 98-5번지에 모셨다. 2020년 삼례중로 개설 공사로 독주항 수로 둑으로 옮겼다가 2023년 6월 지금의 자리에 새 터를 잡았다. 

 

■독주항 소유자
1909년 11월 매매문서에 독주항 수리시설은 죽동궁 민영익의 소유로 기록되어있다. 죽동궁은 순조의 큰 딸 명온공주의 집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1822년 전주 땅에 명온공주방 면세전으로 50결을 사들이었으나 1895년 이후 기록에서는 180결로 거의 여의도 크기로 늘어났다. 명온공주방 궁장토가 늘어나면서 1847년(헌종 13) 무렵에 독주항 수리시설이 죽동궁 소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명온공주의 남편 김현근이 사망한 이후 손자 김덕규가 거주하다가 죽동궁이 민승호의 소유가 되었다. 1874년 민승호가 폭탄을 맞고 죽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양된 민영익이 죽동궁을 상속받으며 독주항 수리시설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1월 세천농장의 지배인 쿠로타 니헤이(黑田二平) 등이 민영익 소유의 독주항 수로 및 제언을 매입하여 전익수리조합 소유가 되었다. 당시 80kg 쌀 1780여 가마에 해당하는 1만1000원에 매입하였다. 올해 쌀값으로 치면 약 3억 5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독주항수리시설 규모 
1909년 독주항 수리시설은 4개면 24개 마을에 걸쳐 보 15개, 방죽 18개, 샘 4개와 대수로(大水道) 42조의 규모였다. 여의도 3.4배에 해당하는 약 300만 평의 땅에 물을 대는 규모의 수리시설이었다.

 

■독주항 수리시설 정비와 관개 지역
전익수리조합에서는 1910년 9월부터 4000원을 독주항 수리시설을 보수하였다. 제방 1.3km을 보수하고, 수로 2.6km 굴착하고, 기존 간선수로 및 지선수로 22km를 준설하여 여의도 4.5배에 달하는 390만 평에 물을 댔다. 1911년 11월부터 독주항수로의 물을 약 12.2km의 간선수로를 통해 황등호로 보내 임익수리조합에 나누어 주었다. 관개 구역은 여의도 면적의 11.4배에 달하는 996만여 평이었다. 익옥수리조합에서 1921년 4월 24일부터 1923년 6월 7일까지 어우보에서 옥구저수지에 이르는 대간선수로 확장공사를 시행하였다. 관개 구역은 8면 37리 2400만평으로 여의도 약 27배 면적에 달하였다. 

■수리조합 수혜자 
전익수리조합은 일본인 21명(28%)이 농지 86.5%, 임익수리조합은 일본인 21명(2.5%)이 농지 80%, 익옥수리조합은 일본인 337명(20.8%)가 농지 88%를 차지하여 독주항 수리시설과 대간선 수리시설의 주 수혜자는 일본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례 독주항 수리시설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했던 수리체계이다. 1614년 광해군일기를 비롯하여 현종실록(1662), 승정원일기(1714, 1725, 1731)에 전주 옥야 40리 수로를 준설 했다거나, 삼례 한내(大川)에 보를 쌓고 물을 끌어들여 전주 동일면과 익산 춘포면의 논에 물을 댔다는 기록이 있으며, 1910년 지형도에 전주 우서면과 동일면, 익산 춘포면에 약 18km의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대간선수로와 지선수로는 대동맥과 실핏줄처럼 만경강 북안의 넓은 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근현대 농업 수리시설의 대표적 유산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조선에 남겨 준 근대화 유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간선수로의 수혜자가 누구였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삼례 독주항수로는 조선 수리체계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지리경제적, 역사적 가치가 조명되기를 기대해본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