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신문]대간선수로는 만경강 수계 상류의 물(대아댐, 경천저수지)을 고산 어우보(취입구)에서 취수해 63Km의 인공 도수로를 통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공급하는 수로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익산 신흥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은 상수도로 사용된다. 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수탈의 물적 토대로 건설된 대간선수로의 역사성과 상징성 ▲대간선수로의 처음 건설과정과 개량 개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모습 등 토목과 수리 측면에서의 탐구 ▲대간선수로의 기능과 역할, 특히 식량자급 또는 풍년 농사를 위한 거대하고 체계화된 수리시스템에 대한 접근 ▲대간선수로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에 관한 이야기 ▲대간선수로의 창조적 미래, 문화적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탐구 등을 전하려 한다.<편집자주>
대간선수로에 관한 글이 완주신문에 연재된 후 완주, 익산, 군산에서는 지역의 역사인문학 모임으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엔 작은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이 인공수로의 가치와 역사적인 맥락 등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라는 생각이 시작의 초심이었습니다. 그 자그마한 바람이 손에 잡힐 듯이 앞에 있는 것을 보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가는 선구자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같아 의연한 마음을 잘 보듬는 중입니다. 차츰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잘 추진되어야 함은 물론 해당 지자체들이 잘 협조하여 보존과 개발의 협치를 이루는 멋진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나무로 읽는 대간선수로’를 쓰기 위해 대간선수로를 따라 걷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의 이 인공수로를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었는데요. 익산의 동산동 아파트 단지 코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촌 뷰였습니다. 이 수로 주변에서 오래 살아온 지역민들은 이 농촌 뷰의 가치를 크게 못 느끼고 지나치겠지만 서울과 수도권의 시민들에게는 상당히 생경한 모습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소소한 매력의 장소입니다. 특히나 수로 주변의 생태습지와 문화 자원은 58km에 이르는 긴 구간을 따라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인문 자원의 기능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대간선수로 곁에서 묵묵히 역사의 현장과 삶의 현장을 지켜봤을 나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전체의 나무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봐도 눈에 띄는 수목 위주로 소개해 드리겠으며 추가로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를 곁들이고자 합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대간선수로는 완주의 어우보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이곳 어우보에는 표석이 있으며 그 주위에 수형 좋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보호수로 지정될 정도의 노거수는 아니지만, 주변에 경쟁목이 없어서인지 수형은 늠름합니다. 100년 전 대간선수로의 시작점인 취수구 공사를 처음부터 지켜보았다면 그 노동의 현장과 그 이후 이 장소에서 있었던 시간의 켜를 다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가끔 나무를 보다 보면 그 나무의 표정이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독자들도 이 나무의 표정을 마음속에 그려 보시면 어떨까요?
느티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나무죠. 동네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을 입구에 커다란 정자목(亭子木)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느티나무입니다. 그 아래에서 동네 어른들은 장기를 두거나 삼삼오오 모여 사는 얘기를 나누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으며 길손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천년을 살 수 있는 나무여서 그런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중에서 은행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완주에서는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총 24주가 느티나무입니다.
옛 그림 속에서도 느티나무를 볼 수 있는데요. 겸재 정선의 노재상한취도(老宰相閑趣圖)입니다. 이 그림은 100년 전인 1925년경 조선에 방문했던 한 수도사가 독일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2005년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반환된 겸재 정선의 화첩 21폭 중의 하나입니다. 아름다운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도포를 걸친 선비가 난간에 기대어 한가롭게 약초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연과 벗하여 약초 캐고 물을 주는 등 전원생활 속에서의 한가로운 선비의 일상을 표현한 작품인데요. 분홍 옷을 걸친 선비 바로 뒤의 큰 나무는 느티나무이고 옆에는 가지가 길게 늘어진 능수버들이 보입니다. 둘 다 줄기의 가운데가 썩어 큰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나이가 적어도 수백 년 된 노거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의 능수버들처럼 대부분의 나무껍질은 세로로 갈라지는 것과 달리, 느티나무는 벚나무처럼 껍질이 가로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목이 되면 이런 가로 갈라짐이 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나 껍질이 얇은 느티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조금씩 흔적이 남습니다. 느티나무나 능수버들의 잎이 핀 상태로는 모든 식물이 잘 자라는 5월쯤으로 보이는데요. 푸릇푸릇 자라 오르는 약초의 생명력을 보면서 지친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약초의 종류를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생강으로 추정되는 모습도 보입니다. 완주를 대표하는 작물 중 완주 생강이 생각나는 그림입니다.
대간선수로의 시작점이 어우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나무는 어우마을 입구이자 수로의 시작점에 있는 감나무입니다. 완주는 생강뿐만이 아니라 감도 유명한데요. 동상면에는 고종시 시조목(始祖木)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완주 구간에는 곳곳에 감나무가 많습니다. 특히 자연형 하천구간에 유난히 많이 식재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인공수로의 시작점인 취수구를 지나자마자 감나무가 줄지어 있는 모습이 반갑습니다. 가을이 되어 감이 주렁주렁 달릴 때면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 짐은 우리의 감성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선조들은 감나무나 대추나무의 줄기가 갈라지는 틈에 돌을 넣어 가지가 쉽게 벌어질 수 있도록 하였는데요. 이는 열매를 맺을 때 통풍과 채광이 잘 되게 하여 열매가 잘 맺도록 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또 감나무는 씨가 8개라 전국 8도를 의미하기도 하는 과일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이인문(1745-1821)의 작품 도봉원장(道峰苑莊)에서 감나무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북한산 자락인 도봉산입니다. 이어서 만장봉과 삼각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요. 오늘날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광입니다. 그림은 서울의 북동부 우이동이나 도봉산 계곡 어디쯤의 ‘원장(苑莊)’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입니다. 원장이란 거의 쓰지 않은 말이지만, 그림으로 봐서는 별서나 서원쯤으로 짐작됩니다. 산 아래는 제법 규모를 갖춘 기와 건물이 정연히 자리를 잡은 원장이 보이고, 앞으로는 20여 채의 초가집이 아늑하고 조용함을 더합니다. 아마 원장을 관리하는 하인들이나 부속 토지를 빌려 농사짓는 백성들의 집일 겁니다. 왼쪽으로는 폭이 넓고 수량이 상당한 개울이 흐르며, 그 양옆으로 가지가 밑으로 처진 여러 그루의 나무는 능수버들 숲입니다. 들판에 한가로이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과 어우러져 한가롭고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초가집 앞의 훌쩍 자란 두 그루의 나무는 먹으로 진하게 처리한 큰 잎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타원형의 잎이나 나무의 생김새, 집 앞이라는 위치 등으로 봐서는 우리와 친숙한 감나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감나무가 오른쪽 언덕 위에 한 그루 더 있어서 이 그림에는 3그루의 감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줄기의 아랫부분에는 ⌃로 깊게 파진 구멍이 보이는데, 노거수에 흔한 줄기가 썩어버린 흔적입니다. 적어도 수십 년 이상 된 감나무 고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옛사람들은 집안에 감나무를 심어 식구들의 간식거리로 이용했는데요. 그림에서는 감나무 3그루가 모두 담장 밖에 심겨있는 것으로 봐서는 개인 소유가 아니라 원장에 딸린 과일나무였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가을에 수확한 감은 최상품을 골라내어 원장에 바치고 나머지를 서로 나누어 먹거나 약으로 썼을 것입니다. 어우마을 입구의 감나무도 마을 입구에 있는데, 사유지가 아니라면 마을에서 공동으로 심어 놓은 나무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감나무의 원산지는 중국 양자강 남부지역으로 따뜻한 곳입니다. 도봉산과 같은 중부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도봉원장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뒤쪽 큰 산들이 차가운 북풍을 차단해 주고 좌우로도 바람막이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정남향의 양지바른 위치라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보온 효과가 높았을 것입니다. 감나무를 특별히 아낀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감은 맛있는 간식거리이면서 제사상에도 올라가는 중요한 과일이었고 수렴제(收斂劑) 등 약으로도 쓰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서 감나무 목재는 치밀하고 단단하며, 특히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먹감나무는 고급 가구재로 널리 쓰였습니다. 마을 옆 언덕배기에는 이외에도 과일나무로 추정되는 몇 그루가 더 그려져 있는데요. 맨 오른쪽 언덕의 뒤쪽 좁고 가는 잎이 늘어진 대추나무, 앞쪽 감나무와의 사이에 조금 연하게 나타낸 동그란 잎이 돋보이는 배나무 등이라고 필자는 추정해 봅니다. 이렇게 원장 앞 작은 숲에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대추, 감, 배등 조율이시(棗栗梨柿)의 주요 과일을 일부러 심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밤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도 잘 섞여 자라므로 뒤쪽 숲에서 따로 조달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원장 안에는 간식거리인 살구나무가 보이고 뒤로는 집 높이 보다 훨씬 높게 자란 소나무와 전나무가 원장 건물들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봉동읍 장기리에서는 왕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연형 하천구간 내에 위치하며 3그루가 마치 한그루처럼 보이는데요. 능수버들과는 달리 가지가 휘어지지 않아서인지 먼 곳에서 보면 느티나무처럼 보입니다. 버들 종류로서 크고 당당하게 자라며 오래 살아 버들의 왕이란 뜻으로 왕버들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전북에서는 김제시 종덕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버들이 있을 정도로 큰 나무가 있고, 궁궐에서도 아름드리 왕버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옛 그림 속의 왕버들로는 신윤복의 풍속화 단오풍정(端午風情)을 소개하겠습니다. 배경은 숲속의 너럭바위를 감싸는 실개천이 흐르고 주위는 숲으로 둘러싸여 만들어진 은밀하고 아늑한 공간인데요. 기생으로 보이는 여인 몇이 대담하게 야외에서 낮 목욕을 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막힌 일이 벌어졌죠. 숨어서 목욕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동자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네를 타거나 쉬고 있는 세 여인 옆에는 굵은 나무 두 그루가 그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네 타는 여인 옆의 왼쪽 노거수가 왕버들입니다. 한 아름이 훌쩍 넘는 고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굽은 줄기 가운데가 썩어 큰 구멍이 있는데요. 옷을 갈아입을 수 있으며 소지품을 보관할 수도 있고 급할 때는 벗은 몸을 잠시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훔쳐보는 동자승 머리 위로 왕버들 가지가 짧게 그려져 있지만 왕버들 가지는 원래의 자람 특성으로 봐서 동자승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이보다는 더 길게 뻗어 있었을 터입니다. 그래야 들키지 않고 훔쳐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더 박진감을 주기 위하여 아래로 늘어진 가지는 과감히 생략해 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나무 아래에서는 한 여인이 가체를 길게 내리고 편안하게 쉬고 있습니다. 기대듯 한 나무는 잎이 역삼각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신나무입니다. 단풍의 붉음이 진하여 아름다움으로 친다면 진짜 단풍나무보다 오히려 더 곱습니다. 단풍나무 중에서는 물을 가장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봉동읍 구미리를 지나는 대간선수로 옆에는 구호서원(龜湖書院)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입구에는 한눈에 봐도 수령이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가 서원의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데요. 이 은행나무는 반남 박씨 선친의 넋과 덕을 기르고 서원을 지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은행나무라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서원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잎이 노랗게 물들면 서원의 그윽한 멋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만나볼 수 있으니 올해는 시기를 잘 맞춰서 그 운치를 느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옛 그림속에 나오는 은행나무 중에서 오늘은 조선 후기 여항문인이자 화가로 활동한 석당 이유신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은행나무 정자에서 가을을 감상한다는 뜻의 행정추상(杏亭秋賞)입니다. 정자는 경치 좋은 곳에 선비들이 소박하게 지은 집으로, 모여서 시를 짓고 감상하던 곳이었죠. 그림에서는 어느 짙어가는 가을날, 여섯 명의 선비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 좋은 계절이라 친한 친구끼리 시회(詩會)를 열고 담소를 나누면서 가을을 느끼고자 했음을 넌지시 알 수 있습니다. 노랑 국화가 피어있고 은행잎은 띄엄띄엄 물들었으며 오른쪽 언덕의 단풍잎도 아직은 색깔을 입히고 있는 중입니다. 그림 가운데의 정자는 짚으로 지붕을 이은 한 칸짜리 모정(茅亭)인데요. 기둥 4개가 구불구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뒷산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참나무를 베어다 껍질만 벗긴 후 기둥으로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축대의 돌쌓기도 주변의 자연석을 가져다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르는 계단은 손잡이 난간도 없는 급경사입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정겨운 정자입니다. 보통 정자 주변은 지을 때부터 자라던 소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으나, 그림처럼 특별히 은행나무를 심고 가꿀 때는 행정 혹은 은행정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 선비들의 모임방 구실을 하는 정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행단의 예를 따른 것으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행단(杏壇)은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이며 그림처럼 선비들의 모임 장소에 은행나무를 흔히 심었습니다. 이 은행나무 아래는 한 뼘 정도로 흙을 쌓아 사각 단을 만든 것도 공자님 행단의 의미를 살리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杏)은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같이 나타내는 글자이므로 행단에 심은 나무가 살구나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지금은 대부분 은행나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간선수로가 완주를 거쳐 익산에 이르면 최근 들어 도시 숲 조성을 통하여 많은 식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산동 은하수로 도시 숲 구간에는 수로를 따라 메타세쿼이아가 열식 되어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데크 길도 조성하여 시민들의 산책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수로 반대편에는 자전거길도 조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수종이 식재되어 있어 앞으로 나무가 커진다면 그늘 또한 풍부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특히 나룻가마을 인화지구와 평화동 목상마을 도시 숲에는 대왕참나무, 이팝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등이 산책로 주위로 식재되어 있어 주변 공단 및 아파트 주민들에게 훌륭한 조경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도시 숲에는 배롱나무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배롱나무는 장마가 끝난 여름날, 햇볕이 따가울 때 여름꽃의 대명사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가을까지 이어지는데요. 콧대 높은 미인처럼 자못 고고합니다. 조용한 산사(山寺)의 앞뜰이나 선비의 공간인 서원 등에 사람이 선택해서 심어야만 비로소 자라기 시작합니다. 진분홍빛 꽃이 가장 흔하고 연보랏빛 꽃도 가끔 있으며 흰 꽃은 비교적 드뭅니다.
나무 대부분은 꽃을 잠깐 피웠다가 금세 모두 떨구지만, 배롱나무는 여름부터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 계속하여 꽃을 피웁니다. 대체로 100일쯤 꽃이 핀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 불립니다. ‘백일홍나무’가 ‘배기롱나무’가 되고 다시 지금의 공식 이름인 배롱나무로 변한 것입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배롱나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꽃 하나하나가 100일을 가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핀 꽃이 져버리면 대기하고 있던 꽃봉오리들이 계속 꽃을 피웁니다.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괴석과 함께 3그루의 배롱나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 숲에는 늘푸른나무로서 소나무도 식재되어 있는데요. 아직은 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오래 살 나무입니다. 천연기념물 나무 중에서 소나무는 5종류로 구분되어 지정되어 있습니다. 소나무, 백송, 반송, 곰솔, 처진 소나무입니다. 모두 합하면 가장 많이 지정된 나무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푸르름을 유지하기에 전통결혼식의 상 위에 대나무와 함께 병에 꽂아 변치 않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대간선수로를 따라 잘 가꿔진 도시 숲이 소나무처럼 오랫동안 푸르름을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소나무가 그려진 옛 그림 중에는 화성(畵聖)이라 일컫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떠오릅니다. 75세 때인 1751년 7월 중순쯤 큰비가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요.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60인치 TV와 맞먹는 크기이며 그의 그림 중에 가장 큽니다.
인왕산은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틈틈이 소나무가 붙어삽니다. 바위가 화강암이므로 풍화되면 굵은 모래흙이 되어 기본적으로 척박하고 메마르죠. 소나무처럼 햇빛 좋아하고 생명력이 강한 나무가 아니면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왕산은 온통 소나무 산입니다. 화가는 바위틈에 한두 그루씩 자라는 소나무의 경우는 작은 미점(米點)으로, 모여 자라는 소나무 숲은 6~15그루씩의 소규모 집단으로 나타냈습니다. 10여 군데의 소나무 숲이 있고 약간씩 농담의 차이도 찾을 수 있습니다. 위치 따라 나무가 잘 자라고 못 자람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왼쪽의 수성계곡 쪽 소나무 숲이 가장 진하고 싱싱한데요. 인왕산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계곡 중에는 가장 길어 주변은 비교적 땅이 깊고 비옥한 탓일 터입니다. 산 아래의 계곡에는 비 온 뒤의 풍광을 강조하는 듯 자욱한 안개가 그림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익산시 오산면 신석교회 앞을 지나다 보면 수로에 나뭇가지를 드리운 자귀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대간선수로에서 이와 같은 모습의 자귀나무를 가끔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자귀나무는 특이한 잎을 가진 나무죠. 낮에는 잎을 펼쳤다가 밤이 되면 마주 보고 있는 잎을 합해 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야합수(夜合樹), 합환수(合歡樹)라고도 얘기하며 부부의 금실을 표현하기도 하는 나무입니다. 대간선수로가 완주에서 익산을 거쳐 군산으로 흘러가듯이 각 지자체가 잘 협업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옛 그림에서도 흔치 않은 자귀나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영, 정조 시기의 화가 김후신의 그림인데요. 기러기와 오리가 자연에서 노는 모습을 그렸으므로 ‘압안도(鴨雁圖)’ 혹은 ‘기러기와 오리’라고 합니다. 바위가 코끼리 코처럼 길게 드리워 바닥의 바위로 연결되어 석문(石門)을 만들었습니다. 석문은 건너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은 신비로움 때문에 옛 그림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데요. 오른쪽에는 고목 맛이 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석문 뒤편으로 자라 올라갔습니다. 그림의 소재로는 흔치 않은 자귀나무입니다. 잎사귀와 꽃을 단 가지도 석문 안팎으로 뻗어 있습니다. 화가는 작은 바위구멍은 물론 석문 안으로도 그려 넣을 만큼 이 나무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확대하여 자세히 보면 긴 잎자루 하나에 여러 개의 잎이 붙어있는 겹잎입니다. 가느다란 붉은 선으로 그린 부분이 꽃인데요. 꽃잎은 모두 퇴화해버리고 가운데 암술을 품은 긴 수술만 남아 있어 마치 화장 솔 같은 독특한 꽃이 된 것입니다. 화가는 자귀나무를 소재로 그림 소장자에게 부부간의 백년해로를 축원하는 마음을 담고자 한 것이겠죠. 대간선수로 또한 오래오래 그 가치가 더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림 가운데는 고개를 아래로 꼬고 있는 기러기 한 마리와 5마리의 청둥오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석문 안쪽으로는 달뿌리풀과 원추리가 섞여 자랍니다. 원추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며 근심 걱정을 잊게 하고 아들을 낳게 해주는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쪽 물가의 바닥에 깔린 풀들은 수생식물로 보입니다. 맨 아래의 흰 나팔꽃도 독특합니다. 덩굴식물인 나팔꽃은 줄기가 길게 이어지므로 장수와 번영을 뜻합니다. 그림에서 꽃이 핀 식물은 자귀나무와 나팔꽃인데요, 모두 6~7월의 여름꽃입니다.
군산 구간으로 접어든 대간선수로는 탑천의 유명한 매운탕 집 앞에 이르러 더욱더 넓은 평야 지대와 접하게 됩니다. 워낙에 너른 평야 지대를 흐르다 보니 유속도 거의 없습니다. 특히 겨울철에는 수량이 풍부하지 않아 수심도 얕아서 겨울 철새들이 먹이 활동하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이곳은 대간선수로와 탑천이 교차하는 장소인데요. 어떻게 탑천을 가로질러 다시 흐름을 유지하는지 궁금합니다. 바로 잠관(潛管)이라는 시설입니다. 잠관은 수로가 도로나 하천의 하저부(河底部)를 가로질러 물이 흐르게 하려고 땅속에 묻는 관으로 대간선수로에는 현재 8개소가 남아 있습니다.
왕버들 소개할 때도 언급했지만, 버드나무 종류는 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물가에서는 늘 버드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 설화에서도 우물가 버드나무가 나오는 이유도 물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곳 탑천에서도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능수버들을 만나게 됩니다. 연륜도 있어 보이고 수형도 멋집니다. 그늘이 필요한 시기라면 당연히 나무 그늘에 의탁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뭇 남정네는 버들잎으로 풀피리를 불었을 것이고 뭇 여인네는 낭창거리는 가지를 꺾어 기다림의 징표로 삼았을 것입니다. 매운탕 집 앞 두그루의 버드나무는 탑천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제게 이런저런 얘기를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옛 그림에 나오는 능수버들 작품은 많이 나오지만 조선 후기 김홍도와 평생지기이자 도화서 화원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이인문의 목양취소(牧羊吹簫)를 소개합니다. 그림에서 보면 물가를 따라 버들 고목이 늘어서 있습니다. 주위로는 8마리의 양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퉁소 부는 소년은 바로 ‘신선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고기잡이하는 아이와 숲 안에서 엎드린 채 쉬고 있는 소 한 마리가 한가로움과 편안함을 더합니다.
우리의 옛 산수화에는 소나무가 가장 흔하고 다음이 버들입니다. 특히 강이나 호수가 포함된 그림에는 반드시 버들이 등장합니다. 가느다란 가지가 땅에 닿을 듯 늘어지는 버들은 수양버들과 능수버들 중 하나인데요. 수양버들은 중국이 고향이고 능수버들은 우리 땅의 토박이입니다. 그러나 둘의 모양새는 너무 닮아 구분이 어렵습니다. 학술적인 쓰임이 아니라면 전문가도 구태여 구분하지 않습니다. 옛 우리 그림 속의 늘어진 버들은 능수버들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에서 능수버들 10여 그루는 굵기가 거의 같습니다. 윗부분을 그리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아마 키도 같았을 것입니다. 고목나무에 생기는 썩은 줄기가 나무마다 그려져 있으니 적어도 수십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홍수가 닥쳐 원래의 나무들은 모두 떠내려 가버렸고, 그 자리에 능수버들만 한꺼번에 터를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굵기와 키 및 나이까지 모두 비슷합니다. 버들은 새싹이 돋으면서 애벌레 모양의 연노랑 꽃이 필 때가 가장 예쁩니다. 그림 가득히 은은한 연두색이 깔려 있지만 계절은 버들꽃이 지고 잎이 다 피어난 늦봄으로 추측됩니다. 소년은 고기잡이를 끝내고 젖은 옷을 말리면서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의 배경에는 전체적으로 목동과 양떼, 연두색 능수버들이 어우러져 서정적이고 따스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목양취소(牧羊吹簫)는 ‘양을 치면서 퉁소를 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대간선수로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곁을 지키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 될 만한 수종을 옛 그림과 비교하며 소개해 드렸습니다. 100년 전 건설되었던 수로이니만큼 그때는 어떤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보았을지 궁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주의 유천습지와 삼례금와습지, 어전교 근처 민주엽나무, 익산 동산동 동춘교 옆에 자리한 수관폭이 수로를 다 덮을 정도의 느티나무, 오산리천 잠관옆의 버즘나무 등 소개해 드리지 못한 나무들도 많이 있습니다. 차후 상세히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대간선수로를 바라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필자는 시간 날 때마다 구역을 나누어 장소성과 역사성, 미래의 가치를 나름대로 정해서 계획안을 만들어 보는데요. 잘 정리된다면 보존과 개발의 양날 속에서 새로운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이제 지역의 자원이 자산이 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