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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완주1]

“인식과 관심 빈약한 완주 동학농민혁명”

 

[완주신문]1894년 2월 15일, 전라도 고부 땅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群衆)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학정을 규탄하며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조병갑은 도망하였고, 관아를 점령한 군중은 봉기의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였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2개월여 동안 고부에서 농성하던 군중은 3월 13일 이웃 고을 무장(茂長)으로 이동하였고, 세력을 결집한 군중은 다시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백산에 집결하였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고부와 무장을 거쳐서 모인 것만 아니었다. 고부 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농성의 연장으로 전라도 일대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인 것이다. 이때 백산에 모인 군중은 8천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의 뜻을 밝히는 격문(檄文), 강령(綱領)에 해당하는 사대명의(四大名義),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의 군율(軍律)을 선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혁명은 같은 해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조선의 풍패지향(豐沛之鄕)이며,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1년여 동안 지속한 혁명의 최대 승리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청군의 한반도 상륙에 위기의식을 느낀 혁명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전라 감사와 합의한 후 오늘날 자치에 해당하는 집강소를 설치·운영하였다. 

 

 

이와 달리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친일정권의 수립 등 국내외 위기 상황에 맞서 전봉준은 2차 봉기를 위해서 삼례에 대도소(大道所)를 설치하며 준비하였다. 그리고 총궐기한 동학 교단과 함께 대일항전을 위해 북상하였다. 그러나 11월, 공주 우금티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며 남쪽으로 내몰렸고, 12월에 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이 사로잡혀 다음 해 3월 순국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1894년 1월의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다음 해 3월에 끝난 이 사건을 동학농민혁명이라 부른다. 즉 동학의 사상과 조직을 근간(勤幹)으로 다수 농민이 참여하여 일으킨 혁명이라는 것이다. 혁명은 비록 좌절하였으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선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나아가 촛불혁명의 뿌리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완주는 무관하지 않다. 1892년 11월, 동학 교단이 주관한 교조(敎祖) 최제우의 신원(伸冤․사면복권)과 동학에 대한 공인(公認), 그리고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금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삼례에서 개최되었다. 그 장소가 삼례 역참(驛站) 터로 오늘날 삼례동부교회가 자리한 곳이며, 전주성 함락 후 부임한 전라 감사가 이곳에 머물며 정무(政務)를 관장하였고, 녹두장군 전봉준이 대일항쟁을 준비하며 대도소를 설치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와 함께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 대둔산 최후 항쟁지이다. 주요 지도자들이 붙잡혀 혁명이 좌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다 옥쇄(玉碎)한 곳이다. 이와 함께 고산의 산천리와 고산읍에서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전투가 있었다. 또한, 고산지역은 동학의 전라도 포교 당시에 동학 교단이 중시한 곳이며, 박치경(朴致景)이 활약하였다. 그리고 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전주 경기전에 보관하던 태조 어진(御眞)과 조경묘에 보관하던 전주이씨 시조(始祖) 위패(位牌)를 위봉산성에 보관하였다. 

 

현재 완주의 삼례에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삼례읍 삼례리 867-2),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삼례읍 신금리 417-3), ‘대둔산항쟁 전적비’(운주면 산북리 산 23-3) 등이 조성되어 있고, (사)동학농민혁명 완주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완주군민 다수는 정읍이나 고창의 동학농민혁명과 달리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접할 기회가 적고, 인식과 관심 역시 빈약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은 그 나름의 특징과 의미가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특히 삼례와 고산은 그 중심지였으며, 그 흔적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박대길 박사는 완주군 구이면 출생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조선왕조실록을 주제로 석박사를 마쳤고, (재)한국경제관계연구원 전문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삼례 행영소(行營所) 연구」,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태조 어진의 위봉산성 보존」, 「동학농민혁명과 삼례」 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완주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 성과>
박대길,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삼례 행영소(行營所) 연구」 『전북사학』 58, 전북사학회, 2020. 
임형진, 「전라북도와 전주 일대의 동학 포덕과정에 관한 연구」 『동학학보』 51, 동학학회, 2019. 
박대길,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태조 어진의 위봉산성 보존」 『전북사학』 56, 전북사학회, 2019.
박대길, 「동학농민혁명과 삼례」 『기록과 기억의 문화사-삼례, 역과 장의 타임캠슐-』, 지역문화연구공동체 모정, 2017.
성주현, 「전북지역 동학과 천도교의 민족운동」 『역사와 교육』 19, 역사와 교육학회, 2014. 
김용환, 「동학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의 상관연동」 『동학학보』 25, 동학학회, 2012. 
박대길, 「東學의 敎祖伸寃運動과 斥倭洋」 『전북사학』 37, 전북사학회, 2010. 
박맹수, 「敎祖伸寃運動期 參禮集會에 대한 再檢討」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성주현, 「제2차 동학혁명과 삼례기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박준성,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내일을 여는 역사』 26,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노태구, 「삼례집회의 반봉건투쟁(1)」 『경기행정논집』 18, 경기대학교학술진흥원, 2004. 
이민교, 『동학농민혁명과 완주 삼례』, 화성, 1997.
원광대학교․사학과 완주군,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사학과, 1999.
이영호, 『전주성을 점령하라 : 전주․완주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 안내서』, (사)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2013
이병규, 『완주의 동학농민혁명』, 완주문화원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