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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산책]억새 풍경이 아름다운 만경강을 걷다

[완주신문]계절이 가을로 접어들면 햇빛부터 달라진다. 여름에 보여주었던 그 예리함이 둔해지고 훨씬 부드럽다. 맨 얼굴로 떨어지는 빛줄기를 굳이 피하고 싶지 않다. 이때가 되면 바람도 덩달아 신이 난다. 습기가 빠져나간 바람은 몸놀림이 가볍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세간에 새로운 뉴스거리가 흘러넘쳐도 가을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갈 뿐이다. 숲을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강가에는 코스모스 길을 만들고 억새꽃으로 단장한다. 예년과 같이 가을 축제를 차근차근 준비한다.

 

그런 계절의 변화가 쉼 없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잘 느끼지 못하고 지나왔다. 물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코로나19도 한몫 했다. 단풍으로 유명한 산을 찾아 단풍놀이하는 것은 올가을은 잊기로 했다. 집 주변에서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봉동읍 봉동교 주변 코스모스 길이 생각나 그곳을 찾은 적이 있다. 원구만마을 주민들이 가꾸고 매년 코스모스 축제를 여는 곳이다. 만경강 제방을 따라 길게 늘어선 코스모스 길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피어 있는 코스모스 길을 걷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올해는 축제도 없고 코스모스꽃도 일찍 졌다. 한눈파는 사이에 코스모스꽃이 이미 시들해졌다. 대신 강가에 핀 한 무리의 억새꽃을  구경하고 왔다. 가을에 잘 어울리는 예쁜 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보았던 억새꽃 풍경을 잊고 있다가 이번에는 만경강 억새 군락 산책로를 걸을 기회가 있었다. 완주군에서 진행하는 ‘만경강 생태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된 익산 춘포에서 완주 비비정까지 만경강을 따라 걷는 행사였다. 춘포 구담교에서 시작해서 억새 군락 사이로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만경강에 이렇게 넓은 억새 군락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만경강 물길을 제외하고 빈 공간마다 억새가 촘촘히 자리 잡아 밭을 이루었다. 왜 만경강 가을 풍경을 보고 노전백리(蘆田百里)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익산천 합류지점에서 잠시 끊어졌던 억새 산책로는 완주 비비정을 향해 계속 이어졌다. 이전에 봉동교 옆에서 보았던 억새는 말 그대로 작은 무리에 불과했다. 이곳은 억새가 바다를 이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파도가 넘실대듯이 하얀 억새꽃이 고운 물결을 일으킨다. 햇빛이 그 위로 쏟아져 억새꽃이 눈부시게 빛났다. 바람이 불면 억새꽃은 살며시 몸을 낮추었다가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 몸놀림이 유연하고 예쁘다. 산책로는 일직선으로 되어있지 않고 굽이굽이 돌아서 간다. 그래서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빠른 속도로 스캔해서 아름다운 화각을 마음속에 담았다.

 

이런 길은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천천히 걷는 것이 좋겠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경쟁하듯이 걸을 필요도 없다.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고 마음이 가는 대로 걸으면 좋겠다.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잠시 쉬기도 하면서 말이다. 모처럼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걸었다. 파란 하늘에 걸린 억새꽃 무리가 예쁘다. 억새꽃에 취해 걷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멀리 비비정 카페 열차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