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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야로 만경강]‘구름 섬’ 운주 금당리 용계원 용솟음

[완주신문]지난 1968년 용계원에서 1년 산 좋은 추억 나눌 분이 적어 안타깝다. 오라하는 이 없고, 막상 찾아 갈 집 없다. 이는 지나가는 세월 탓이다.

 

당시 마을 분들마다 나를 반겼고, 나 역시 고마웠음은 모두 인정 때문이었다.

 

6․ 25전쟁 후유증으로 상처가 컸지만 말 함부로 안했고, 나 또한 그 아픈 데를 건드릴 필요 없어 내 일만 열심히 했다.

 

떠난 지 40년! 1년 산 나에게 공주 같은 따님 혼인 주례 부탁하는 고운 심성이 바로 용계원 인심이다. 이 인연이 노년을 행복하게 한다. 그럴수록 용계원을 머릿속에 담고 사는데 마침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임방규 빨치산 격전지 답사(9)]’에서 ‘용계원’ 이야기를 보았다. 

 

“(송세영 설명) ‘용계원’ 이곳은 1950년 12월 10일경부터 1951년 1월 17일까지 충남도당 도 사령부와, 도 기관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부락입니다. 일제시대 한지를 만든 공장이 있었고, 산간 부락이면서도 부촌이었습니다. 1951년 1월 14일,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충남도당 주최로 열렸지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일 밤 참모부 일꾼들의 경각성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고지에 부대 배치를 늦게 했어요. 그 짬에 경찰 기습을 받았습니다. 용케도 재빨리 반격했기에 피해가 없었습니다. 도당위원장 박우연 동지는 있지도 않은 여러 부대를 호칭하며 ‘동서로 포위 공격하라’ 명령했습니다. 이에 겁먹은 경찰들이 물러남으로써 희생 없이 무사했지만 외곽 방어선인 운주면 용평부락에 있던 압록강부대가 같은 시간에 기습을 받아 약간의 피해를 입고 철수했습니다.”

 

마을이 다 타 없어진 비극, 70년 전 이야기이다. 오늘의 용계원은 어떤가. 조만곤, 최병준, 손응배 그 외 여러분이 살아있다면 오라하고 왜 자주 오지 않나 책망(?)할 친구들인데 나만 혼자 남아 용계원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안하다.

 

다행히 최병훈 님 전화가 젊은 시절을 잊지 않게 한다. 꽃집 마당(손세항)이 학생들 운동장이었고, 손영조 선생 내외분과 그 따님 손을정의 배려가 컸다. 방앗간 집에서 이삿짐을 실어 나르고, 호범진 아버지가 지고 온 솔가지가 등을 다습게 했다. 옥배 최소령, 활골 강희영이 친절했으며, 삼거리-고당-피목-금당도 그 때 알았고, 천등산 꼭대기를 밟은 일이 엊그제 같다. 아이들이 돌을 치우자 ‘물 잘 내려온다.’ 어른들이 치하했으며, 자갈밭 큰 돌을 밀어내고 고속도로라 하니 시장 다녀오던 활골 분들도 좋아했다. 김 모인은 양귀비 몇 포기를 심었다가 잡혀갔다. 나무 베다 곤혹 치르는 주민(이원구)을 사정하여 무사케 한 일들 52년 전 얘기이다. 손정화는 (주)하림에서 만났는데 어디서 사는지!

 

교실 두 칸 화장실 하나가 용계원의 자랑이던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