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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교육공동체가 아니라 마을학교공동체다

[완주신문]마을교육공동체를 알게 된 것은 2014년 즈음이었다. 완주를 방문한 경기도의 한 교사가 마을교육공동체라는 정책공약을 현장에서 어떻게 실현할지 물어 왔었다. 마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던 나로서도 생소하고 어려운 말이었다. 다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인디언의 속담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이 홍성 풀무학교의 모습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농촌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막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이의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다가 자동차와 가벼운 접촉사고가 있었다는데 며칠 후 가정통신문이 왔다. 자전거 통학을 금지한다는 학교의 대책이었고 일방적인 통보였다. 비정상적이었다. 학교가 면사무소나 파출소와 만나 아이들의 자전거 통학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마을교육공동체가 만들어진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마을교육공동체는 보편적인 교육정책이 되었다. 우리 지역도 다양한 학교의 프로그램에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참여하고 있고 방과후 학교를 통합하는 풀뿌리교육지원센터가 생겼으며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꾸는 다양한 민관학 협력조직이 만들어졌고 고산고등학교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공립형 대안학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학교 교육’과 ‘마을 교육’은 다른 것이고 학교의 ‘교사’와 마을의 ‘강사’를 구별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학교는 마을 안에 있지 않은가. 학생은 마을의 아이가 아니던가.

 

농촌의 인구가 감소하면 사회서비스의 질이 낮아진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이다. 교육의 질이 낮아지면 자녀가 있는 젊은 주민들은 도시로 이주한다. 그렇게 고령화와 인구감소의 악순환이 일어나 농촌은 소멸의 위기 앞에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청년들이 농촌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으며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평생 일할 수 없고 아무리 일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며 도시의 생활을 포기했다고 한다. 또한, 농촌을 찾아오고 농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탈학교 아이들은 늘어나고 있고 대학 진학률도 떨어지고 있다. 그렇게 학교도 위기 앞에 서 있다. 이렇게 농촌과 학교의 위기는 맞닿아 있다.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도시를 만들며 경제성장을 했고, 경쟁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입시에 가두었다. 성장해야만 하고 그래서 경쟁해야만 하는, 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강박적 패러다임이 이 둘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같은 원인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학교와 마을은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야 한다.

 

호세 신부가 만든 직업학교가 스페인의 몬드라곤을 세계적인 협동조합의 도시로 만들었고 슈마허 컬리지가 영국의 토트네스를 전환도시운동의 발상지로 바꾸었다. 강원도 원주에는 대성학원이 있었고 충남 홍성에는 풀무학교가 있었다. 혁신학교인 삼우초등학교가 지역의 젊은 인구를 늘리고 고산면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경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을과 학교는 공동운명체이다. 마을교육공동체가 아니라 마을학교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