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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완주2]

베일에 가린 완주 대표 동학교도 박치경

[완주신문]지난번에는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큰 틀에서 설명하였다. 이번부터는 동학의 창도(創道)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긴 여정을 완주를 중심으로 차례로 연재하고자 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완주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요 지역에 집중된다. 즉 삼례와 고산, 그리고 대둔산 등이다. 

 

 

■ 동학 창도와 전라도 포교
19세기 중반, 우리나라에도 서구(西區)의 열강(列强)이 동양(東洋)을 압박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특히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던 대국(大國) 중국이 1842년 영국과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패배하고 수도 북경이 함락당하며 굴복함으로써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이 증대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 사회는 60여 년에 걸쳐 특정 가문과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弊害)로 인해 탐관오리의 부정과 부패가 일상화되어 오갈 데 없는 민중은 희망마저 잃었다. 

 

경상도 경주의 유력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불운을 겪어야 했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음), 경주 용담정에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평등사상과 새 세상을 염원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동학을 창도하였다. 

 

수운의 평등사상은 곧바로 실천으로 나타났다. 즉 여종 2명 중 한명을 수양딸로, 한명을 며느리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하던 천주교(天主敎)의 평등사상과 같으면서 다른 것이었다. 천주교의 평등은 절대자 하느님 아래 평등이었으나 수운의 시천주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이 있어 존귀한 존재임으로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모든 교도에게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맞절을 하도록 한 데서 드러난다. 

 

특히 일본과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는 척왜양(斥倭洋)의 민족 자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돕는 나눔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질병의 치료와 길흉(吉凶)에 대한 예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동학은 당시 핍박받던 민중의 의식과 염원을 수용하여 체계화시킨 것으로 일반 민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학의 성장은 기득권 세력에게 배척과 모함, 나아가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수운은 경주를 떠나 전라도 남원에서 6개월여 머물면서 교리와 경전을 완성하고, 경주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남원을 비롯하여 전라도 여러 곳에 포덕(布德)한 것으로 전하는데, 완주지역은 확인되지 않는다.

 

■ 동학 탄압과 동학 교단 정비
조선 정부는 인간 평등을 내세워 신분제(身分制)를 부정하고, 민간에 깊숙이 전파되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급속히 확산하는 동학을 천주교의 아류(亞流)로 여기고, 탄압하며 차단하는 조치를 하게 된다. 

 

동학이 창도 된 지 불과 3년 만에 교조 최제우를 체포한 조정(朝廷)은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고 어지럽힌다.”라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거짓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힌다.”라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1864년 3월, 대구 관덕정에서 처형시켰다. 이와 함께 동학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를 빙자하여 관원과 세도가(勢道家)들이 동학교도의 생명은 물론 재산까지 수탈하며 탄압하였다. 

 

최제우를 이어 동학 교단을 맡게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최제우가 남긴 말과 글을 모아 경전(經典)으로 간행하고, 동학의 제의(祭儀)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동학 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 결과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동학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민중의 염원(念願)을 수용한 교단의 조직화가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 고산접주 박치경
완주의 대표적인 동학교도로 박치경이 있다. 그런데 한자로 朴致京. 朴致敬, 朴致景 등으로 세 사람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은 박치경(朴致京)이다. 1885년 6월, “신사[최시형]가 지목(指目)의 혐의로 익산(益山) 사자암(獅子庵)에 숨어 사실 때 박치경(朴致京)의 주선으로 무릇 넉 달 동안을 지내시다. 박치경이 상주(尙州) 전성촌(前城村)에 가옥 세 칸을 사들여 신사댁 한집안 식구를 머물러 살게 하다.”라는 것이다. [『天道敎書』, 第二編 海月神師] 

 

다음은 박치경(朴致敬)이다. 즉 “병술년(1886년) 봄. 대신사가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살았다. 그때 서인주(徐仁周)․황하일(黃河一)․손천민(孫天民)․박치경(朴致敬) 등 여러 교인이 차츰 모여들어 계(戒)를 받고 도(道)를 믿었다.”라는 것이다. [『待天敎宗繹史』 第二編 第八章 遺蹟刊布 ; 『東學道宗繹史』 第二編 第八章 遺蹟刊布及降書] 또한 같은 시기 “신사는 그때 전성촌(前城村)에 있으면서 스스로 야인으로 행세하였다. 손천민(孫天民)․박인호(朴寅浩)․이영영(李榮永)․권병일(權秉一)․권병덕(權秉德)․임덕현(林德賢)․서치길(徐致吉)․박치경(朴致敬)․송여길(宋呂吉)․박시요(朴時堯) 등이 차츰차츰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라고 하여 이미 입도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本敎歷史』, 第二編 海月神師]

 

1년의 차이가 있지만, 1885년 해월이 방문한 익산 사자암은 고산과 가까운 곳에 있다. 따라서 고산 접주로 알려진 박치경이 해월을 모셨을 가능성은 크다. 또한 1년이 지난 1886년에 ‘해월을 찾아가 계를 받고 도를 믿었다.’라는 기록은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 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해월의 본격적인 동학 재건 시기에 박치경이 입도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다음 기록을 통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1893년 보은집회 이후 고산을 근거지로 하는 朴致景과 [『東學史』(草稿本)三, 報恩會集과 京城會集], 전봉준의 1차 봉기에 고산에서 기병(起兵)한 朴致京이 있다. [『東學史』(草稿本)三, 南北調和] ‘景’과 ‘京’으로 한자는 다르지만, 둘 다 고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다. 그리고 호남의 두령급 인물로 朴致京[『東學史』(草稿本)사(四), 官吏의 羅網에서 튀여난 頭領들]을 소개하였다. 따라서 동일 인물을 한자 표기가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천도교에서 간행한 문헌을 보면, 박치경은 1883년경에 입도하였고, 1884년 해월 최시형이 관의 지목을 받자 피신처를 제공하고 안내하였다. “신사[최시형]는 고산접주 박치경의 주선으로 가족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전라도 익산 사자암으로 몸을 숨겼다. 박치경은 신사의 가족을 걱정하여 은밀히 상주 화서면 봉촌리 앞재에 초가 3칸을 마련하고, 단양 장정리에 있는 신사의 가족을 옮기게 하였다. 신사는 사자암에서 4개월을 머물며, 호남지역의 포덕 기반을 넓혔다. 박치경의 안내로 익산․전주․여산․고산․삼례 등지에 동학을 전파하였다. 사자암은 단순히 신사의 은신처가 아니라 동학의 교세가 전라도 지역으로 확대되는 중요한 거점의 역할을 하였다.”[『신인간』,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 「해월신사의 생애(7)」, - 경전 간행과 동학 바람 -. 2018.7.29]라고 하여 박치경이 해월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가족을 돌보았으며, 전라도 포교의 거점이 사자암이었다는 점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박치경의 개인사는 드러나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