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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산책]우리나라 최초 한옥 성당, 되재성당 가는 길

[완주신문]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멈칫멈칫하는 것이 느껴진다.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과 새로운 계절을 갈망하는 마음이 교차하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 주변에 하나 둘 꽃이 피고,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서는 잎들이 싹을 틔우고 있는데 또 방송에서는 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도 잠시 일뿐 그렇다고 다시 겨울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루 이틀 심술을 부려보지만 이내 매서운 기세가 사르르 녹아버리고 봄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이제는 스치는 바람 속에서 훈훈한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럴 때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따라 성지 순례를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성당으로 말이다.

 

되재성당은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원승마을에 있다. 화산면 소재지에서 경천저수지를 지나서 몇 굽이 돌아가면 산속 깊숙한 마을 끝에 있다. 도로 상황이 좋아진 지금 입장에서 보면 저수지와 멀지 않으면서 산속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성당이 세워진 시기를 생각하면 통행이 불편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깊은 곳에 되재성당이 자리 잡았던 이유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 있다.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사옥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0년이 지난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천주교 박해가 진행된다. 그 박해를 피해 들어와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게 된 곳이 고산 지역이다. 지금으로 보면 고산, 비봉, 화산, 동상, 경천, 운주 지역에 해당된다. 되재성당이 있는 원승마을도 그중 하나이다. 산속 깊은 곳이라서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886년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를 종교로 인정받고 자유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그 결과 1892년 우리나라 최초 성당인 약현성당이 서울에 세워졌고, 두번째로 1895년 되재성당이 완주 화산에 생겼다. 되재성당은 당시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고려해서 한옥 구조로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이다. 

 

이런 천주교의 지나온 과정을 생각하고 되재성당 가는 길을 바라보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선구자들의 고뇌와 고통을 생각하며 지나게 된다.   

 

되재성당을 향해 가다 보면 미남(彌南)마을 앞을 지난다.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 미륵산(彌勒山)이라서 미남마을로 불리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그 당당함에 위축이 든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00년 된 느티나무이다. 마을 입구에 이런 나무가 있다는 것은 마을 역사 또한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 1789년 호구총서에 운동면 미남리로 기록된 것을 보면 200년을 훌쩍 넘겼음을 알 수 있다. 

미남마을을 지나 3km 정도 안쪽에 원승마을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건너편 산자락에 기대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입구는 넓고 뒤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마을이라서 골목도 단순하다. 먼저 마을 안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로 지은 집 사이로 낡은 쓰러져가는 집들이 하나씩 보인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풍경인데 세월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연신 눈길을 보내 쓰담쓰담 해준다. 오래된 마을의 골목은 멋대로 굽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집 아니면 몇 집이 처음 이곳으로 들어와 집터를 잡고 그 뒤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한 집씩 넓혀가다 보니 골목이 반듯할 리 없다. 원승마을의 이런 골목 풍경이 정겹다. 마을 골목을 돌아보고 되재성당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은 마을 위쪽에 있었다. 마을에서 되재성당으로 가는 길 옆 돌담에는 지나온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마을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다. 꾸미지 않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돌담을 보면서 되재성당으로 들어섰다. 

 

되재성당으로 들어서면 한옥 구조의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멀리서 들려오던 종소리가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이렇게 종탑으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성당 건물은 한눈에 보아도 새로 지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1895년에 완성되어 사용하던 되재성당 건물이 한국전쟁 시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공소를 재건했다가 2009년 원형으로 다시 복원했기 때문이다. 성당 건물 안에는 처음 지었던 성당 건물 사진이 남아있다. 이런 기록이 있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이 가능했다.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부 중간에 칸막이가 되어 있다. 유교 관습이 남아있던 시절이라서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 자리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잠시 마루바닥에 앉아 당시 미사를 보던 교인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바깥 건물 구조를 보면 일반 한옥 구조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들의 출입문이 건물 좌·우측에 분리되어 있고 문 앞에는 작은 마루가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한옥 구조에서는 마루가 이어져 있는데 되재성당 건물은 마루가 분리되어 있어 마치 회랑과 마루가 복합된 구조이다. 출입문이 건물 좌·우측에 세 개가 있는 것 역시 유교적인 관습 때문이다. 노인, 장년, 어린이 구분하여 출입문을 달리했다. 성당 건물 뒤쪽에는 두 신부의 묘지가 있다. 조스 신부(1851~1886)와 라푸르카드 신부(1860~1888)의 것이다. 먼 나라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여기에 잠들었다. 되재성당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두 신부 묘지를 끝으로 되재성당 답사를 마치고 되돌아 나왔다. 개울가에 활짝 핀 노란 산수유꽃이 마을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