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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산책]비봉 천호마을 골목을 걷다

[완주신문]2021년을 마무리하는 12월도 숨 가쁘게 시간이 흐른다. 신년 타종식을 앞둔 초를 다투는 카운트다운은 아니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수순에 들어가면서 왠지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고 있는 느낌이다. 잠시 바쁘게 돌아가는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비봉면에 있는 천호마을이다.

 

천호마을을 가기 위해 고산면 어우리에서 비봉면 방향으로 들어섰다. 길 양쪽으로는 산줄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비봉면은 산골짜기에 들어선 마을들로 구성된 지역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이 있다. 그렇게 3km 정도 가면 비봉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를 지나 1km쯤 갔을까 작은 공원이 차를 세운다.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이지만 유난히 멋스러운 비봉공원 표지석에 눈이 간다. 비봉공원이 있는 곳이 천호마을이 있는 내월리이면서 달이실의 초입이다. 달이실은 옛 지명으로 한자로 표기하면 達谷(달곡)이었다. 달이실은 고구려말로 산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실제 천호마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달이실의 중심이었던 내월마을이 가장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었다.

 

 

비봉공원을 지나 3km 안쪽에 천호마을이 있다. 천호마을은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전후해서 주로 충청도,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천호산(天壺山, 501m) 아래 골짜기로 숨어들어와 신앙공동체를 만든 것이 마을의 시작이다. 처음 교우촌을 형성할 때는 위쪽 무등골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는데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0년대 이후에는 골짜기 밑으로 내려와 점차 아래쪽으로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구조를 보면 골짜기 위쪽에 천호성지가 있고, 골짜기를 따라 집들이 길게 늘어선 모양이다.

 

마을 입구부터는 마을 길을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집의 돌담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새로 쌓은 돌담이지만 옛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가 읽혔다. 마을 골목 어딘가에서는 분명 옛 돌담의 흔적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마을 안쪽을 향했다. 약간 높은 위치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나무가 있는 곳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나무는 여느 마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느티나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천호마을에서는 이 느티나무보다 큰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 수령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천호마을 역사와 함께한 나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무 아래에는 작은 피에타 상이 놓여 있다. 골목 나무 아래에 놓인 피에타 상이 생소하기만 하다. 어느 마을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천호마을이 천주교 교우촌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순간이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서쪽 산 너머가 여산이다. 예전에는 산길을 이용해서 여산을 오갔다. 장을 보는 것도 고산장보다는 여산장으로 주로 다녔다고 한다. 여산 고갯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옛 돌담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집과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골목이 보인다. 옛 마을 정취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방향을 바꾸어 마을 위쪽에 있는 천호성당을 향해 걸었다. 시골 마을이지만 전반적으로는 골목 분위기가 산뜻하다. 반듯하게 관리된 돌담과 담에 기대어 있는 나무들의 단정함이 인상적이다. 발길이 닿는 골목마다 잘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골목을 돌아서면 멀리 성당 종탑이 보인다. 천호마을 골목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돌담길이다. 마을 입구에서 예상했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투박한 돌을 사용해서 쌓은 돌담이 골목마다 잘 남아 있다. 물론 처음 마을이 생길 때 있었던 돌담은 아니겠지만 그 전통을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집 앞에는 작은 문패를 대신해서 큰 돌에 이름을 새겨놓기도 했다. 가족 모두가 세례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천주교 교우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천호성당은 골목 맨 위쪽에 있다. 천호성당은 1913년 기와집 공소 강당과 신부 침실이 건립되었으나 1953년 한국전쟁 이후에 공소 건물을 다시 지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노후되자 철거하고 새로 세웠다. 현재 성당 건물은 2008년에 한옥 구조로 지은 것이다. 천호성당(본당)에 들어서면 마당에 특별한 종이 걸려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종탑은 별도로 있다. 이 종은 한국전쟁 직후에 불발된 포탄피로 만든 것이다. 전쟁에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 지금은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천호마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 중의 하나이다.

 

천호성당(본당) 동쪽에 있는 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천호성지로 이어진다. 천호성지 입구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휴식기를 맞이한 넓은 정원을 지나면 대나무 숲길이 나온다.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잘 정돈된 대나무 숲길이 도드라져 보인다. 대나무 숲길 끝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제방을 따라 저수지를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산책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저수지에서 다시 정원 쪽으로 올라갔다. 정원을 지나자 천호마을에서 걸어왔던 도로를 다시 만난다. 도로를 따라 천호성지 안쪽으로 걸었다. 오른쪽에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지나면 왼쪽에 순교자 묘지가 있고 그 아래쪽으로 성당 건물이 보인다. 천호성지 안에 있는 성당이다. 부활성당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건물 구조가 예쁘다. 성당을 지나 동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저수지 주차장 쪽으로 이어진다. 주차장을 지나 숲길 도로를 이용해서 마을 입구로 내려왔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도로라기보다는 산책로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상쾌하기도 하고 운치도 있어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

 

 

천호마을은 큰 마을이 아니라서 마을 골목만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겠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천호성지와 연계해서 걷는다면 훌륭한 산책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산책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면 천호마을을 찾아 천호성지까지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