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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계곡에서 피어난 가야의 추억

[완주신문]최근 경천면 신흥계곡에서 가야유적으로 추정되는 야철지(冶鐵址)가 발견됐다. 완주군은 총 54개소(봉수10, 산성9, 제철유적35)의 가야유적지를 발굴했다. 특히 봉수대는 당시 이곳에 반드시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완주의 옛 힘을 상징하는 사례로 볼만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곧이곧대로 수용해도 될까?

 

역사는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학문이다. 불분명하게 내 던져진 어떤 대상에 상상으로 가미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 내포된 사건의 조각을 꿰맞추는 식으로 옛 스토리를 재생해낸다. 시간의 경과가 오래된 역사 일수록 해석자의 상상력이 더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사람들이 좋아 하는 것은 발굴된 유물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들 사이를 엮기 위해 조직된 상상일지도 모른다.

 

가야인들이 지켜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 발굴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삼국으로 알아온 고대 왕국의 역사를 다시 써야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학계는 그간 신라나 백제, 혹은 고구려 역사를 밝혀내는데 온갖 총력을 기울이면서 왜 가야왕국에 대한 조사는 지금까지 지연되어 왔을까? 그 해답은 일본의 역사왜곡에 있다.

 

120년 전 일본은 자국의 통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바탕으로 조선의 가야를 연구한다. 이 책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를 일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들에 따르면 임나(任那)란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국 남부에 있었던 일본 식민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곳 통치를 위해 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10년 한일 병합당시 일본은 ‘상고시대의 옛 질서 회복‘을 운운하며, 임나일본부설 이론을 식민시대 역사로 활용했다.

 

문화인류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론이 얼토당토않다고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회 발전 수준 차이가 너무 현격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서기전 24세기에 이미 청동기문화에 기반한 고조선이 성장했는데, 일본열도에는 서기전 3세기 무렵에서야 야요이(미생彌生)문화가 등장했다. 그것도 한반도가 일본으로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를 고려할 때 고대 일본이 가야를 중심으로 약 200년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인 셈이다. 하지만 일제의 왜곡된 역사관에 익숙한 세대들은 이미 가야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형성된 상태로 독립을 맞았다. 이는 지금까지 가야 역사 연구에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다이아몬드는 각국에서 벌어지는 역사 분쟁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사 연구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시대의 안경을 완전히 벗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120년 전 일본처럼 특정 의도로 기획된 이데올로기의 편협성에 휘둘린 역사는 후세대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분명하게 내 던져진 어떤 대상에 상상으로 가미된 의미 부여를 최소화하고, 그 속에 내포된 사건의 조각은 가능한 한 자연 발생적 실험과 검토를 거치는 방식으로 연결시켜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보기에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방법은 마땅치 않다. 기본적으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으로 해석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를 주도하는 자가 미래를 이끌 수 있음으로 필요에 따른 재해석을 용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를 경우 완주군에서 발견된 가야 유적은 이를 대하는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일본은 완주군에서 발견된 가야유적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고 싶어 할까? 이 나라는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적인 국가로,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 때문에 매년 고고학 발굴에 천문학적 예산을 쓰지만 일각에서는 자신들의 현재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기에 열도의 편협한 역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다이아몬드는 일본의 사례를 눈 여겨 보라고 말한다. 유물이든 사료든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해석은 결국 임나일본부설처럼 왜곡된 역사의식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할 때 무더기로 쏟아지는 역사 발굴 현장 앞에 선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식이 필요할까?

 

민족주의 사학을 따를 경우 역사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다이아몬드의 권유를 취한다고 해서 완전히 있는 그대로의 옛 가야인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우리가 바랄 바는 오랜 침묵 속에 침잠해 있던 가야인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든 역사가 현재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완주의 정체성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우선돼야 하는 것도 기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