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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시와 살가운 조우를 위한 ‘비비정’

[완주신문]만경강 일대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산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목나무 위에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멸종위기에 처한 새매가 앉아 있다. 늪 바닥을 쪼고 있는 천연 기념물 고니 건너편에는 원앙을 닮은 넓적부리가 수면을 가르고 있다. 떼 지어 다니는 물닭과 물오리떼까지 온갖 새들로 겨울철이 되면 강은 활기로 시끌벅적하다. 게다가 전세계적으로 2만 마리밖에 없다는 느시까지 겨울을 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느시는 경계심이 워낙 강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 밖에도 수많은 개체들이 자기 종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생존투쟁 속에서 강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생명존속과 무관하게 이곳을 찾는 존재도 있다. 사람들은 취미를 즐기기 위해 만경강을 찾는다. 한 무리의 야구부대 뒤로 몇몇 마니아들이 골프 연습에 나섰다. 그 앞쪽에는 군에서 설치한 운동기구들이 있고, 천변 둑에는 자전거가 다닌다. 캠핑족의 텐트를 지나 억세풀 우거진 강물 근처로 가면 낚시꾼들이 자리를 잡았다. 하늘에 시선을 빼깃 사람들을 좇아 고개를 드니 푸른 창공에는 패러글라이딩이 한참이다. 또 일군의 무리는 만경강 탐방을 나섰는지, 연신 막대기를 휘저으며 늪지를 향해 걸어간다.

 

이렇게 만경강은 온갖 생명체들이 종의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존 현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유희의 터전이다. 이를 두고 어떤 활동이 더 가치 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익하겠으나, 인간의 취미 활동으로 인해 빚어진 문제가 의견을 분분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만경강이 다양한 생명체들의 보고인 만큼 이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취미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경강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갖가지 취미활동으로 수많은 생물체들이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 캠핑족에게 낭만을 더해주는 모닥불은 고슴도치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사산하거나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또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터져 나오는 함성은 번식철 새들이 새끼를 버리고 도망가게 한다. 소리는 생존과 직결됨으로 야생동물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을 듣거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쪽일수록, 생물 개채수가 현저히 낮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방증한다. 이런 이유를 들면 만경강 생물을 보존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은 삶의 유희를 위해 다른 생명체에게 피해를 주는 취미 행위를 지양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칸트의 취미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취미 활동에 단순한 유희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관조와 평가, 즉 취미를 욕망한다. 아름다운 대상들은 합목적적 형식을 갖추고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보는 순간 무심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취미 추구는 본능을 따르는 행위로, 생존과는 무관하지만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인류의 문화사가 취미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일리가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 문인들은 아름다운 골동품을 수집하고 이를 그림 속에 표현하는 서화 활동을 했다. 또한 미적 기호를 공유한 사람들과 정서를 교환하고, 이를 통해 안정과 위안을 찾음으로써 삶의 고단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만경강에서 펼쳐지는 현대적 취미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캠핑이나 자전거 타기, 패러글라이딩을 통해 아름다움을 관조한다. 여기에서 쾌적한 만족감을 산출하며, 유사한 정서를 가진 이들과 무리를 형성하고 또 삶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받는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어느시대 보다 피곤한 현대인에게 취미는 필수적인데, 만경강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장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생명체들의 생존권을 위해 무조건 만경강을 비워 줄 수도 없고, 취미활동만 지지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 문제는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한 취미 활동이 있는 모든 곳에서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떠올려 볼 수 있는 대안은 ‘비비정’에서의 조우다. 삼례 후정리의 비비정은 조선시대 건립된 누각인데,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도 불린다.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사람들은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비비정을 지었지만, 기러기도 머물다갈 만큼 운신 반경에 신경을 썼다. 이는 낯선 생명체들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만경강에서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골프공이 날아간 그 지점에 즉사할 만한 생물체가 없는지, 다른 생명체의 주거지역에 텐트를 친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필 때 평화로운 회우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