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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스님이야기]모악의 기상

[완주신문]57년전 모악산에 들어온 벽암스님은 이곳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풍수지리도 공부해 이와 관련된 전북도 설화에도 밝다. 이에 20여년전 도내 일간지에 관련내용을 1년간 기고하기도 했다. 2023년 가을, 모악산과 인근 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하기 위해 스님이 펜을 들었다.<편집자주>

 

■장군봉(장군대좌)
올해로 모악산에 들어온지 57년째가 되니 반세기가 지났다. 12세에 김제 흥복사 선원에서 전강 선사(선종 77대)를 모시고 초파일에 출가 인연을 맺어 소양 송광사 총무를 보던 중 모악산 수왕사의 이석우 스님에게 다음 대의 주지를 부탁받고 들어와 7번째 중창주가 되어 진묵조사전과 요사채를 건립 중수하고 약수터를 정비했다.

 

그후 대외활동을 하며 수왕사 약수를 소개하고 전대 스승에게 일인 전승으로 전수받은 곡차인 송화백일주와 송죽오곡주를 통하여 절의 역사와 곡차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모악산인으로 기틀이 잡혀간 것은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모악의 전설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모악산은 도내 어느 곳을 가든지 바라볼 수 있고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산으로 우뚝 서 있고, 시대에 따라 사방으로 기운을 한 번씩은 드러내 위치해 있는 각 사찰마다 시대를 풍미했다. 서쪽으로 금산사, 동쪽으로 대원사와 수왕사, 남쪽으로 장파사(폐사), 북쪽으로 주석원(폐사) 등의 불법의 가르침을 지상에 내려 꽃피운 적이 있다. 

 

이러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땅에 맺힌 힘은 하늘에 닿은 가장 숭고하고 높은 곳에서 시작되는데, 육당 최남선이 영호당 석전 선사와 함께 호남 일대를 답사하며 남긴 기행문 심춘순례에서 수왕사를 찾아가는 길처에서 모악산의 국사봉을 언급했고, 모악은 스승으로서의 국사봉 아래 장군대좌를 중심으로 감투바위, 투구바위, 무인의 기운을 상징하는 무지(외무지, 내무지)마을, 마음마을(말의 울음을 상징하고 마을의 뒷능선을 칼등날이라 부름, 장수굴), 말의 안장으로서의 치마산 혹은 도설산으로서, 한 판의 전투를 그리며 승리를 한 후 다시 성현으로 발돋음하여 코끼리를 타고 모악으로 회귀하는 형국으로 감상해볼 수 있다.

고스락 국사봉에서 시작된 천기의 흐름이 지명이나 뜻의 형태를 쫓고 갖추는 원리는 답사와 연구를 거듭할수록 오래전 선조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어, 한 사람의 모악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 시대에 와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게 한다. 지상의 형상을 좋은 뜻으로 만들어가려는 인간의 노력과 그것을 본받으려는 선근을 들여다보게 되어, 이 또한 모태로서의 모악산이 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국사봉 아래 중앙에 자리잡고 모악을 수호하는 장군봉은, 기세와 형상에 따라 폐장, 졸장, 민장, 승장으로서 대장군이 있는데 모악은 장군의 소품인 장검, 성곽, 군사 등의 지명(武池, 內武池, 外武池, 新基, 半月, 望山, 馬音, 成德, 東城, 佛재)을 살펴보면 승장으로서 격을 갖추었다 보여진다.

 

모악산의 암반은 결절이 많아 잘 끊어지고 부서지는 암질의 성격으로, 모악산 대장군의 성질은 불처럼 높은 기상을 뿜게 되고, 장군봉 좌측에 검봉 두 개가 나와 있는데, 이 검은 벽에 세워놓은 것처럼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고, 열거한 마을로 내려가는 지명을 읽어봄으로써 전투 후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게 되어, 도내 모악의 힘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모두에게 희망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우뚝 서 있다.

 

■물뿌리봉(무제봉)  

긴 세월동안 모악산은 미륵신앙과 토속신앙의 주산으로서 도민의 정신적 영역과 닿아 있었다. 국사봉을 모태로, 그 밑에 무제봉과 수왕대, 해달봉을 두어 신과 숭고한 그 무엇인가의 존재에 다가가고자 하늘에 대고 생명의 근원인 물을 구하는 예를 취했다. 

 

수왕사 주지 부임 후 들은 대중 전언에 의하면 나라에서 매년 삼짇날(3월 3일) 전라감사가 기우제를 집전했다고 한다. 그러한 흔적으로 수왕사에는 돌위폐와 고천제단의 돌기둥이 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악의 기우제는 매년 삼짇날 전라감사 집전 하에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준비하여 수왕사에 올라 천제당에서 하늘에 대고 작은 고천제를 먼저 올리고 나서 물심봉(물뿌리봉) 밑의 무제봉에 올라 장군봉(장군대좌)을 살피며 대제를 올렸다.

 

전에는 산줄기의 중요 혈자리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장군대좌나 부근에 묘가 있다면 즉시 파묘를 하고 무제봉에서 풍악을 올리고 재물을 올려 수왕대 위로 솟아있는 물심봉(수왕사 약수 雪泉의 물뿌리)에 3일동안 비를 구하는 제를 올렸다고 한다.  

 

모악의 기우제에 대한 풍경의 기억될 만한 장면으로, 약 50여년전 여름에 유난히 긴 가뭄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도는 이야기로 옛날처럼 누군가 장군대좌에 몰래 묘를 썼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 생각해 날카로운 농기구 등을 들고 수왕사와 무제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고, 장군대좌에 올라 많은 사람들이 수색하는 것처럼 퍼져 묘를 찾기 시작해 최고의 명당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련의 묘를 발견하여 파묘하고 비료 부대에 유골을 담는 작업을 하는 중에 검은 구름이 달려와 순식간에 산봉우리에 퍼지더니 폭우가 시작되었고, 굵은 빗줄기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군중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 당시 모악의 장군대좌에 내려오는 전설과 현실이 맞물려 펼쳐지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본 것은 지금도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는데, 지금보다는 농경문화에 더 적극적이었던 시절이었고, 생명의 근간인 물의 근원을 하늘과 더 가깝게 닿아 있는 고스락 정상에서 물의 뿌리를 찾았다는 것은, 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우리의 태동과 소멸에 있어 함께 두근거리는, 어머니로서의 모악산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사진 출처- 『풍수기행 모악산-단행본』, 벽암 스님·김상휘 공저, 신아출판사, 2005    
          - 『벽암 스님의 풍속기행, 모악의 정맥을 찾아서-기획 연재』, 전북일보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