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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동읍 상장기공원 비석은 누구 것?

일부 비석 보존 적절성 논란
일제강점기 친일 인물일수도

[완주신문]만경강변에 위치한 봉동읍 상장기공원에는 15개의 비석이 쭉 늘어서 있다. 해마다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해 당산제를 지내는 바로 옆이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본래 현재 봉동농협 자리가 읍사무소였고 그곳에 있던 비석들을 농협이 들어서며 이곳으로 옮기게 됐다.

 

하지만 누구의 비석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면장들 비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그럴 경우 친일파 비석을 보존하는 게 될 수도 있기에 확인해 봤다.

 

지난 2006년 비석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완주군에서 그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의뢰했고 이곳 비석들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

 

당시 발간한 <문화유적분포지도-완주군>에 따르면 이곳 비석은 ▲서기순 불망비(조선, 관찰사) ▲이목연 불망비(조선, 관찰사) ▲권직상 불망비(근대, 군수) ▲윤여신 불망비(조선, 도순찰사) ▲최원화 불망비(근대, 면장) ▲김정식 불망비(현대, 신기진흥회장) ▲조구하 불망비(조선, 어사) ▲윤원병 불망비(조선, 참봉) ▲이원구 기념비(근대, 면장) ▲김숙연 불망비(현대, 면장) ▲금숙연 자선비(현대, 도사) ▲김시풍 불망비(조선, 중영장 겸 토포사) ▲신사영 불망비(조선, 판관) ▲홍희경 불망비(조선, 판관) ▲홍형근 불망비(근대)이다.

 

아울러 비석에 적힌 인물에 대한 기록은 <조선선정불망비군총록>을 참고했다.

 

하지만 7명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나머지 인물에 대한 내용은 없다. 비석 크기와 비석을 세운 연도 정도만 있다. 비석을 세운 시기가 없는 것도 5개나 된다.

 

게다가 비석을 세운 연도와 시대 분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이 생긴다.

 

특히 근・현대 비석 중에는 시기적으로 일제강점기일 가능성이 높아 친일파 의혹도 있다.

 

이 곳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마을 이장 A씨는 “어려서 일제강점기 면장 비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만약 친일파라면 훌륭한 선인들 비석과 함께 두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완주군 또한 이곳 비석들에 대한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완주군 관계자는 “비록 부정적인 것도 역사의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보존할 필요가 있다”며,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과거 사실을 보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편”이라며, “당사자나 후손들이 부끄러운 과거 기록을 없애려 했기에 흔적 찾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과거 관청이 있던 자리에 비석 세웠다”며, “하지만 관청 이전으로 관리가 안 되고 대부분 방치되다 후대에 모아 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또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한 지역인사는 “기록이 분명한 선인들 비석과 정보가 없거나 추모하기 어려운 인물들의 비석을 나란히 두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비석들에 대한 조사와 적절성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제안했다.

 

예로 비석 중 김시풍 불망비는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시풍은 조선말기 무인이며, 1894년 전라감영 영장으로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 입장에서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관리이겠지만 현 시대의 동학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은 “일제강점기 면장이면 친일을 한 이들이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말단 부역자까지 모두 실을 수 없었다”며, “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일선에서 악랄하게 우리 민족을 착취한 게 바로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선정비는 시대를 막론하고 고관대직이나 지역유지들이 자기 자랑을 위해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며, “요즘 식으로 선행이나 치적을 미디어나 현수막 등을 이용해 자랑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꼬집었다.

 

<문화유적분포지도-완주군>에 기록된 비석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서기순 불망비
시대: 조선
관찰사 서기순 영세불망비는 크기가 54*13*113cm이며, 1847년 7월에 세웠다. 서기순(1791~1854)은 달성 서씨로 대제학 서영보의 아들이며, 1826년 중과문과에 급제해 1837년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내고 184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이목연 불망비
시대: 조선
관찰사 이목연 영세불망비는 51*18*130cm이며, 1840년 11월에 세웠다. 관찰사 이목연(1785~1854)은 전주 이씨로 182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27년 지평, 이후 이조참의, 승지,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권직상 불망비
시대: 근대
군수 권직상 영세불망비는 46*18*130cm이며, 1906년에 세웠다.
권직상은 1900년 남원군수를 지냈으며, 당시 남생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했고, 1904년 전주향교 명륜당을 중수하는데 공이 있다.

 

▲윤여신 불망비
시대: 조선
도순찰사 윤영신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44*24*124cm이다. 1886년에 세웠다.
윤영신(1831~?)은 파평 윤씨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1964년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869년 광양현감을 거쳐, 1879년 이조참의를 지냈고, 이어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강원관찰사, 광주부유수 등을 역임했다.

 

▲최원화 불망비
시대: 근대
면장 최원화(崔瑗澕)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52.5*21*124cm이다.

 

▲김정식 불망비
시대: 현대
신기 진흥회장 김정식(金晶植) 영세불망기념비의 크기는 33*30*158cm이다.

 

▲조구하 불망비
시대: 조선
어사도 조구하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46*13*112cm이며, 1847년 9월에 세웠다. 조구하(1815~?)는 풍양 조씨로, 문신이고 자는 기서이다. 1842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시찰했고, 1862년 5월 11일 박용운의 주도 아래 금구현 주변의 주민 수천명의 환곡이전에 따른 폐단을 항의하며 시정을 관아에 호소했다. 그러나 현령 민세호는 이를 단순한 민원으로 받아들여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때 전라도 지역에 파견된 호남선무사가 조구하였다.

 

▲윤원병 불망비
시대: 조선
전 참봉 윤원병 적덕불망비의 크기는 38*10*101cm이다.

 

▲이원구 기념비
시대: 근대
전도정현 면장 이원구 기념비의 크기는 52.5*21*144cm이다.

 

▲김숙연 불망비
시대: 현대
전도사체 면장 김숙연 공선불망비의 크기는 42*11*104cm이고, 1850년 3월에 봉상면에 세웠다.

 

▲금숙연 자선비
시대: 현대
전 도사 금숙연 자선비의 크기는 37*12*106cm이며, 1863년 7월에 세웠다.

 

▲김시풍 불망비
시대: 조선
중영장 겸 토포사 김시풍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44*18*130cm이고, 1886년 10월에 세웠다.
김시풍(?~1894)은 조선말기 무인이다. 전라감영 영장으로 1894년 당시 60세로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다.

 

▲신사영 불망비
시대: 조선
판관 신사영 만세불망비의 크기는 50*22*132cm이며, 1656년 3월에 세웠다. 신사영 (1670~1736)은 조선후기 문신이며, 평산사람이다. 1733년 사복시첨정으로 있을 때 64세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해 지평, 1734년 장령.헌납. 사간을 지내고, 다음해에 병조참지를 거쳐 승지에 임명됐다. 공무를 집행할 때에는 거침없이 왕에게 직간하고, 사생활에서는 근검으로 일생을 지낸 그 지조가 높았다.

 

▲홍희경 불망비
시대: 조선
판관 홍희경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47*15*148cm이며, 1823년에 세웠다.

 

▲홍형근 불망비
시대: 근대
홍형근 시혜(施惠)불망비의 크기는 38*13*107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