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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전면 무상버스, 도시를 바꾸는 마중물

[완주신문]한국의 이동권은 사실상 자동차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도로, 주차장, 주거단지 등 생활 방식 모두가 ‘차가 있다는 가정’ 위에서 돌아간다. 하지만 자가용 이용이 제한된 계층, 즉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생기면, 혹은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이 구조에서 곧바로 배제된다.

 

내 어머니가 그렇다. 30년 넘게 무사고로 운전해 왔지만, 이제는 고령이 되었고,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돌보느라 차를 놓을 수 없다. 체육공원이나 수영장에 가는 일상조차 차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 노인 무료 택시 제도는 있지만,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쉽게 이용하지 못한다.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믿을 수 없다면 자동차를 놓는 순간 곧바로 삶의 반경이 줄어든다.

 

이 이야기는 비단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 장애인, 청년, 저소득층 모두가 자동차 없는 삶을 꾸려가기 어려운 사회 구조 속에서 비슷한 장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해외 여러 도시는 대중교통의 이용을 쉽게할 목적의 일환으로 요금을 없애고, 이동권을 보편적 권리로 보장하려는 실험에 나섰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은 2013년 세계 최초로 수도 단위 전면 무상교통을 도입했고, 룩셈부르크는 2020년 국가 차원에서 무상교통을 시작했다. 두 사례는 내 어머니 같은 시민이 차를 놓고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이었다. 실제로 저소득층과 고령층의 이동권은 크게 넓어졌고, 사회적 형평성에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캔자스시의 경우 전면 무상버스 시행 뒤 시민 절반 이상이 자동차 사용을 줄였고, “이제야 이 도시가 나의 도시처럼 느껴진다”라는 응답까지 나왔다. 요금 장벽이 사라진 순간, 이동권이 회복되고 시민의 생활 패턴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녹색전환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고령화율 30% 이상, 재정자립도 높은 지역부터 전면 무상버스를 도입하면 효과가 크다. 실제로 전국 15개 지자체가 시행 중인데, 평균 도입 비용은 인구 1인당 연간 1만 5천원 수준이다. 결코 재정에 큰 부담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고령화 대응, 온실가스 저감, 지역경제 순환 효과까지 고려하면 사회적 편익은 훨씬 크다.

 

한편,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탈린과 룩셈부르크 모두 자동차 의존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고, 탄소 감축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무상교통이 사회복지와 이동권 정책으로서는 성공적이지만, 환경 효과를 내려면 서비스 개선·교통수요관리와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무상버스가 자리 잡으면 도시 풍경은 달라진다. 청년·노인·장애인의 생활 반경이 넓어지고, 병원·도서관·문화시설 접근성이 높아진다. 자동차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교통 혼잡과 미세먼지가 줄고, 도시는 더 안전해진다. 그러나 요금만 무료가 되어서는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배차 간격, 노선, 접근성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재원과 책임을 나눠야 한다.무상버스는 단순한 교통비 절감책이 아니다. 자동차 중심 도시를 대중교통 중심 도시로 바꾸는 전환의 마중물이다. 내 어머니같은 사람이 안심하고 차를 놓을 수 있는 사회, 대중교통이 이동권의 기본값이 되는 사회가 될 때 비로소 도시는 지속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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