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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정체성 찾기2]천주교 최초 순교자

양반가 분노 샀던 제사금지 ‘진산사건’ 현장
저구리-용계원-고산-용진 개바위 압송길
압송길에 쓴 윤지충 일기에 완주 지명 가득

[완주신문]조선의 천주교 최초 순교자는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다. 이들이 체포돼 재판을 받기 위해 금산에서 전주로 이동하는 압송길은 현재 완주군이다. 죽음을 앞둔 압송길에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압송길이 완주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연결점을 찾아봤다.<편집자주>

 

 

조선 천주교회 최초 순교자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인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는 전주 풍남문 밖 마당에서 두 사람 목이 잘려나간다.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이었다.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 후예로 번성한 해남 윤씨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그런 그에게 사촌 형제 정약용이 찾아와 신분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천주학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천주를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외사촌 형제인 권상연도 함께 천주학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1790년 청나라에 있던 구베아 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고 이런 소식이 조선에까지 전파된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숭배해야 하는 천주교에서 조상 숭배는 바로 미신이었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제사를 금지한다는 소식에 정약용은 물론 정약전, 이가환 등 기존에 천주교를 신봉했던 학자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천주교를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는 미련 없이 어머니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한다. 이유는 천주교 교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권상연 역시 윤지충과 같은 행동으로 친척과 친지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았고,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온 나라에 가득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결국 형장에서 참수당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이 사건을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 한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한문에 정진해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 고종 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알게 되고 신앙에 대해 알게 됐다.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해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진산군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결국 이들은 잠시 다른 곳에 숨어 지냈다. 

 

그러자 진산군수는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으니 그 때가 1791년 10월경이다. 

 

당시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 대답하자 자신의 힘으로는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감영으로 이송토록 했다. 

 

 

윤지충 일기로 본 압송길
당시 이들이 전주감영으로 압송돼 오던 길 가운데 이 지역에서는 저구리를 시작으로 싱거랭이 주막에서 쉬었다가 산수가 절경인 용계원을 지나 경천 갱금이와 고산성당, 용진 개바우를 지나쳤다. 

 

해 질 무렵 이들은 안덕(현 전주 인후동)에 도착해 전주감영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은 윤지충의 일기로 본 그의 압송길을 따라가 본다. 

 

■ 10월 27일. 27일을 별다른 사건없이 지나갔다. 28일 조반때 내 사촌 권상연 야고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도 신문을 당하였는데 그도 같은 질문을 받았고 나와 똑같이 대답하였다. 해가 질 때쯤 나와 내 사촌은 다시 불려갔다. 큰 칼이 벗겨지고 작은 칼이 씌워졌다. 

 

군수는 우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전라도 감사 정민시가 있는 전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비들의 도를 따라 즐거운 길을 가지 않고,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다니 이게 무슨 짓들이냐?”

 

우리는 둘 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니 군수는 우리를 내보냈다.

 

우리는 형사문제를 담당하는 사령과 포졸 한명과 옥리 한명에게 동반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곧 떠나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우리가 관아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밤이 되었으므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면임집에서 잤다.

 

■ 10월 29일. 29일 첫 닭이 울 때 우리는 길을 떠났다. 신거런(현 싱그랭이) 주막에서 처음으로 쉬며 조반을 먹었다. 그 다음은 개바우(용진 개바우)에서 쉬며 말을 먹였다. 해가 질 무렵에 안덕에 있는 고간들의 여인숙 근처를 지나서 조그만 산등성이를 넘자, 우리를 데리러 오는 감영 나졸들을 만났다. 수많은 포졸들이 큰 고함을 지르면서 전진하여 오는데, 어찌나 소란을 피우든지, 우리를 잡은 것이 마치 큰 도둑이나 잡은 것 같아 보였다.

 

우리들 목에 18근짜리 큰 칼을 씌우고, 그리고도 목을 쇠사슬로 얽고, 나무길고리로 오른손을 칼 가장자리에 잡아매었다. 

 

■ 10월 30일. 30일 새벽녘에 우리는 방을 또 옮겨야 했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밝자 우리는 감영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오후에 감영에 불려나가 신문을 당하였다. 

 

감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경서가 부족하단 말이냐? 어찌하여 미신에 빠진 것이냐?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 

 

우리는 “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오,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심계와 칠극으로 요약됩니다.”

 

관리되지 않는 압송길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되는 과정은 모두 완주군 지역과 접점 크다. 이후 11월에 쓴 윤지충의 일기는 전주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속에 나타난 신앙의 일기로 쓰여 있다. 그들은 12월 8일 현재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된다.

 

이처럼 윤지충과 권상연은 완주군과 전주시 모두 200년전 종교와 관련된 역사에 밀접히 연결돼있다. 하지만 이들 압송길은 현재 산길 가운데 몇몇 구간만 확인 가능할 뿐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완주군과 천주교 전주교구와의 최초의 순교자 압송길에 대한 관리 협력이 절실해 보인다. 

 

운주면에 거주하는 최재홍(71)씨는 “완주군 동북부 6개면은 진산사건이 이후 충남과 호남에서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마을을 형성한 곳이 많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압송길이 제대로 된 모습으로 갖춰지면 이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이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