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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정체성 찾기1] 되재성당

천호-되재-수청을 잇는 순례길의 역사적 의미 높아
화암사와 쌍계사 기둥, 되재 성당 건축에 쓰이기도
동학-서학의 충돌현장으로 천주교인 박해 흔적 남아

[완주신문]완주는 금속 문명의 태동지로 역사적 가치가 무척 높다. 때문에 완주군은 역사적 정체성 강화를 통해 완주의 자존심과 위상을 강화하는 신(新)완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가야사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완주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문화재 발굴과 근현대사 기록화가 핵심이다. 옛 고서에 뛰어난 연설보다 무딘 붓의 힘이 강하다는 말을 쓸 정도로 기록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완주의 역사 가치 고증은 완주 군민의 자존심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국민의 자긍심으로 확장하기 때문에 관광산업의 발전이라는 부가가치도 생성된다. 완주군의 역사적 정체성 찾기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화산면 승치리에 위치한 한강 이남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연결점을 찾아봤다. 특히 되재성당에 대해 알려진 내용보다는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편집자주>

 


산업으로 발전하는 순례길
순례란 종교적인 의미로 성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는 행위. 본디 종교의 발생지나 본산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해 참배하는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순례는 단지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더 광의적인 의미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순례의 어원적인 의미로 보면 ‘돌아보다’라는 육체적, 정신적 행위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순례길은 어느 장소를 방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곳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다시 새롭게 하고 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로는 야고보의 길(EL CAMINO DE SANTIAGO)을 걸으면서 다음 질문들을 묵상하면서 걸었다 한다.

 

“나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나는 어느 곳에 존재하며, 나는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 

 

바로 순례길은 단지 와서 보고 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걷는 길이다. 수려한 천혜의 자연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최고의 길인 것이다. 

 

특히 되재성당지는 220여년전부터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천주교 교우들이 교우촌을 형성해 살았던 지역으로 천호성지를 비롯해 되재성당, 저구리피난처, 수청성당 등 신앙인들의 깊은 터전이기도 하다.

 

되재성당은 ‘사목의 길’ 중심
천주교에는 사목자인 신부가 상주하는 곳을 성당이라 부르며, 신부가 거주하지 않지만 마을안의 기도 장소를 공소라 칭한다.

 

옛 되재성당은 신부가 거주하는 장소였다. 특히 되재성당은 주변 40여개의 마을에 있는 공소들을 관할하는 중심지였다.

 

1887년 보두네 신부는 고산 신자들이 신앙이 있는데도 지도하는 선교사가 없어 그 신앙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뮈텔 주교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써 라푸르카드 신부가 고산 으럼골에 부임해 이 지역 교우촌을 돌며 사목활동을 펼치다 부임한지 1년만에 빼재에서 장티푸스로 선종하게 된다.

 

이후 3년동안 상주 선교사를 파견하지 못하다 강원도에서 전교하던 우도 신부가 이 곳에 파견됐다.

 

그 당시 전국에서 교우 수와 공소가 가장 많은 지역은 전라도로 이 때문에 전라도 남부지방은 베르모렐 신부가, 중부지방은 전주에 부임한 보두네 신부가, 이곳 고산은 우도 신부가 차돌빼기(현 백석마을)에 부임해 전교활동을 펼쳤다. 

 

우도 신부는 독수골이며, 오두목, 홍동골, 은판골, 어두재, 먹방이, 어름골, 시목동, 다리실(천호), 운문, 석장골, 안심, 단지동, 장수리, 죽림, 밤실, 어두리, 소두러니, 다리목 등 총 40여개에 달하는 공소를 맡아 활동했다. 

 

이 지역 교우 수만도 1000여명에 달했다 한다. 

 

우도 신부님의 후임으로 발령받은 비에모 신부는 차돌빼기가 오래 상주할 수 있는 거점 역할에 부족함을 느끼고 되재로 옮겨 이때부터 관할 공소의 중심 성당으로 자리잡았다. 

 

 

화암사와 쌍계사 기둥으로 건립
1894년 뮈텔주교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재 고산에서 예외적인 개종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교리문답 두 짐이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갔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비에모 신부가 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거처를 되재로 옮긴 시기와 비슷하다. 

 

당시 고산지방 신앙공동체는 활기에 차 있었고 외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비에모 신부는 되재에 자리잡고 본격적인 성당건축에 나섰다.

 

건축비는 우선 외상으로 하고 남아있는 잔금이 충분치 못할 경우 비에모 신부님이 본국인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해 해결하기로 했다.

 

성당을 짓는데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도 합세해 일손을 거들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의 목재는 인근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에서 가져왔으며 충청도 은진에 있는 쌍계사를 매입해 절을 뜯고 그 목재를 성당을 짓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건축이 활기를 띨 무렵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비에모 신부는 이곳을 떠나야 했으며 신도들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됐다.

 

동학과 충돌로 참혹한 수난
되재는 동학군이 천주교와 충돌한 장소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충돌이라는 표현보다는 일방적 학살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 있다.

 

당시 동학군은 고부농민봉기 이후 삼례를 출발해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한 군대와 전투를 벌여 패하자 뿔뿔히 흩어지며 되재로 숨어 들어왔다.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동학과 서학의 만남이 이뤄진 것.

 

동학군은 이곳 교우촌에 들어와 배교를 강요하고 모진 고문을 행한 일이 무수히 벌어졌다 한다.

 

비에모 신부가 뮐텔 주교에게 당시 상황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면 참혹한 상황이었다.

 

“우리 교우들 70여명이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여자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할머니는 뼈를 휘게 하는 형벌을 당했다. 아마 산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모두 이런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도 역시 극도의 괴로움과 곤궁에 시달렸다. 긴 석달을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과 싸워야 했다.”

 

동학군을 피해 산 속으로 숨은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걸은 길을 상징하는 14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며 견뎌냈다 한다.

 

산속 깊이 피난 온 교우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14처를 행하며 박해에 굴하지 않고 굳은 믿음을 지켜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되재와 차돌빼기를 넘나드는 십자가의 길은 교우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했던 시련의 장소이자 은총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여기 십자가의 길은 비에모 신부의 사목활동에서도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성무집행은 별다른 사고 없이 마쳤다. 동학농민군들은 나를 붙잡기 위해 매복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인데 반천주교인들의 계획을 우롱하는 천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들을 모면케 해 주셨던 것이다.”

 

비에모 신부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걸었던 14처 십자가의 길을 행하며 교우촌을 드나들었고, 현재도 이를 기리기 위해 14처가 만들어져 있지만 부실한 관리가 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북도 기념물 제119호
되재성당지(升峙聖堂地)는 완주군 화산면에 있는, 되재성당이 있던 터이다. 2004년 7월 30일 전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됐다.

 

되재성당은 1895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완공된 성당으로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 세워진 성당이며, 최초의 한옥성당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성당건물이 전소됐고 그 자리에는 1954년에 다시 세운 공소건물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