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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됐지만 여전히 마을 지키는 돌부처

땅속에서 나온 지장보살 ‘석지장’
수로 만들며 발견되고 재난 해결
문헌기록 230년 전 유물로 추정

[완주신문]세월에 잊힌 돌부처가 지난 2018년 문화콘텐츠 기획자 손안나 작가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일명 석지장(石地藏)이라 불리는 돌부처는 230년간 삼례읍 후정리 금반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다. 손 작가는 돌부처를 찾아내고 관련 자료를 확인했으며,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소외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 있는 지장보살은 여전히 방치돼 수풀에 가려져 있다. 이에 손안나 작가가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이곳 돌부처를 다시 소개한다.

 

 

삼례 대명아파트와 삼례역 사이에 있는 밭 가운데에 둥근 머리모양과 길쭉한 사람몸 윤곽을 갖춘 돌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벽과 지붕 안에 세워져 있다. 석지장이라 불리는 이 돌부처는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은 이름처럼 땅 아래 있는 보살로 지옥에서 모든 중생이 구제될 때까지 성불(成佛)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죄인들을 구원한다. 이에 불교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해 지장보살에게 기도한다. 그런 이름과 역할 때문인지 삼례에 있는 지장보살도 수풀에 가려져 찾아보기 힘들만큼 방치돼 있다.

 

마을주민에 따르면 예전에는 부처님 오신 날에 제도 지내고 불상을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져 사람들이 찾기도 했다.

 

■ 돌부처, 수로 사고 해결
금반마을 어르신들에 의하면 돌부처는 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쭉 있었다. 당연히 아이들 놀이터였고 불장난을 하다 새카맣게 그을음을 만들기도 했고 아직도 그런 흔적이 있다.

 

이 마을에는 돌부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또한 완주군과 완주문화재단이 공동 연구한 ‘2016 완주군 마을문화실태조사 삼례편’에는 석지장과 얽힌 민담이 여럿 소개돼 있다.

 

먼저 마을 앞에 지금은 복개됐지만 수로가 지나고 있고 석지장은 이 수로와 관련돼 있다. 옛날 수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팠는데 돌부처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수로를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는데, 자꾸 흙이 무너져 내려 애를 먹었다. 수로 만들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 한 스님이 이 마을을 지나다 ‘돌부처를 지금 자리에 모시면 제방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주민들은 이곳에 돌부처를 모셨고 이후 흙이 무너지지 않아 제방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 수로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어 마을에 근심이 컸다. 이 때 또 한 스님이 마을을 지나다 ‘돌부처를 세우고 모시면 인명피해가 없을 것’이라 했다. 이에 마을에서 돌부처를 이곳에 세웠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때 수로의 제방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이를 수리하기 위해 도랑을 파다가 돌부처를 발견해 일본인들이 돌부처에 울타리를 치고 보호했는데, 그 후로 제방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 금반마을이라는 이름도 돌부처와 관계가 있다. 돌부처를 모시라는 스님의 말에 주민들이 돌부처를 모시기 위해 땅을 팠는데 땅속에서 금반지가 나와서 마을이름이 금반마을이 됐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제방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돌부처가 발견되고 현재 자리에 돌부처를 세우면서 사고들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 문헌에 230년 전 유물로 기록
일제강점기 일본인 후지이칸타로가 1930년 발간한 ‘불이농촌(不二農村)’ 책자에서 이 돌부처에 관한 기록과 사진이 담겨있다.

 

기록에 따르면 1930년으로부터 140여년 전(2020년 기준 230년 전) 삼례의 부자 백대석이 대굴할(수로)공사를 할 때에 대단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꿈속에서 본 송아지가 달리는 방향으로 공사를 진행한 덕에 완공할 수 있었고 수로의 이름을 독주항(犢走項)이라 부르게 됐다. 이 독주항을 만들 때 발견된 돌부처를 어느 때인지 잃어버렸으나 수로를 확장하면서 다시 찾았고 석지장을 위해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독주항에 다한 기록은 광해군 때에도 발견된다. 과거 호남에는 익산 황등제, 김제 벽골제, 정읍 눌제라는 3개의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전라도를 호남지방이라 부르게 된 것도 황등제(황등호수) 이남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 황등제는 늘 물이 부족해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는데, 만경강에서 물길을 끌어오기 위해 만든 게 바로 독주항이다.

 

광해군 일기 6년(1614년) 3월 16일 기록에 의하면 이미 삼례 아래쪽부터 황등제에 이르는 40리의 도수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종, 숙종, 경종, 영조실록과 여러 기록에도 이곳 수로 정비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1927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도 전북지역 수리조합의 만경강 수로사업 관련 기사가 게재됐고 독주항에 관련된 내용이 실렸다.

 

 

■ 보존해야 하는 귀중한 자산
완주군은 지난 2018년 이후 정기적으로 제초작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석지장은 밭 가운데 수풀에 덮여 무덤처럼 보인다.

 

이에 만경강사랑지킴이 회원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돌이더라도 엄연히 문헌기록도 남아 있는 230년 된 선조의 유물”이라며 “이렇게 방치돼 있는 게 속상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손안나 작가는 “지자체에서 푯말이라도 설치하고 향토문화 콘텐츠 측면에서 스토리텔링을 더한다면 지역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완주군은 석지장이 유물로 지정되기에는 조건이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해당 장소에 도로가 생길 예정으로, 위치를 이동시킨 후 관리하겠다고 밝혔다./글 유범수 기자・사진 이호연 작가